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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치포럼] 포스트미디어 시대의 가치 변환 2019.10.24

2019년 10월 24일(목) 연합회 강당에서 제3차 YWCA 미래가치포럼이 열렸다. 김은주 위원장(미디어소통위원회) 진행으로 이택광 교수가 <포스트미디어 시대의 가치 변환>을 주제로 강의했다. 제3차 포럼 강의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 본 내용은 2019년 월간<한국YWCA> 11+12월호에 실렸습니다.


 

편지와 소셜 미디어

새로운 미디어는 과연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는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유튜브를 비롯한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생각과 미디어를 연결시킨 최초의 이론가는 아마 플라톤일 것이다. 그는 문자의 출현으로 인해 인간의 기억력이 감퇴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 문자를 사용해서 글을 쓰게 됨으로써 인간은 전혀 다른 문명의 차원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글(쓰기)는 원시적이지만 가장 본질적인 미디어다. 한 지점에서 출발해서 다른 지점에 이르는 편지의 형식은 오늘날 모든 미디어의 기본을 이룬다.

 

새로운 미디어 특성: 불확실성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편지라는 과거의 형식을 ‘소셜미디어’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처음에 무료 문자 서비스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는 트위터의 기원을 상기해 보면, ‘소셜미디어’ 역시 발신자와 수신자라는 편지의 기본 양식에 기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제 ‘소셜미디어’는 특정한 개인이라기보다, ‘사회’라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수신자가 분명하지 않은 편지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새로운 미디어 양식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익명을 위해 발신하는 편지라는 점에서 ‘소셜미디어’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불확실성을 지니게 되었다.

 

‘소셜 미디어’ 자체가 미디어의 본래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형태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순수한 미디어성은 저널리즘으로서 뉴스와 방송이 내포하고 있던 ‘정보’의 매개로서 기능하는 미디어라는 원래의 속성을 해체하는 것이다. 무릇 저널리즘이라고 함은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에 있었다. 현실이 사실의 총합이라는 실증주의 태도가 저널리즘에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현실은 사실에 우선한다는 세계관에 기반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현실에 맞춰 재조정되거나 재해석되어야한다는 입장이 대세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 인간 사유가 변화되는 시기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미디어의 변화는 곧 사유의 변화라고 보았다. 영화의 발명은 시공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바꿔놓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영화로 인해 인간은 눈앞에 그대로 펼쳐지는 리얼리티를 불편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는 판타지이지만, 그냥 그 자리에 머물며 환상의 자유만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현실 자체로 전이되어 인간의 사유를 지배하게 된다. 이런 전이의 방식을 벤야민은 사유에 대한 미디어의 간섭이라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디지털 시대는 디지털이라는 미디어를 매개로 인간의 사유가 변화되는 시기를 뜻한다. 디지털은 임의의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의 단위에 들어맞게 데이터를 끊어서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처리된 데이터는 숫자로 표기된다. 이 방식이 미디어에 적용될 때 대체로 신호왜곡이 줄어들어 더욱 선명한 화질과 음성 재생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단위에 들어맞지 않는 데이터의 왜곡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탈중심화 ‘포스트미디어’

이런 디지털 기술의 정점에 인터넷 환경이 놓여 있다. 개별 제작자나 수용자의 차원을 서로 연결시키는 네트워크라는 점에서 인터넷 환경은 전혀 다른 차원을 인류 문명에게 제공했다. 게다가 인터넷 환경은 정보의 전달로서 미디어의 희소성을 약화시킴으로써 콘텐츠의 상품 교환가치를 무효화한다. 누구도 자신의 화폐로 콘텐츠를 구매하고자 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미디어의 탈중심화를 ‘포스트미디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근대의 미디어가 정보의 중심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포스트미디어’는 이런 중심화를 해체하고, 개별 수용자들이 동시에 단순한 수용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미디어를 재구성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정보와 지식의 성격도 바뀌었다. 과거가 ‘탐험가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관광객의 시대’이다. 탐험가가 지리적으로 미답의 지역을 찾아가는 존재라면, 관광객은 이미 알려진 지역을 찾아가는 존재이다. 탐험가는 여행을 떠날 지역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관광객은 떠나기 전에 이미 해당 여행지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관광객은 탐험가와 달리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여행을 간다고 말할 수 있다.

 

유튜브: 플랫폼 자본주의가 미디어성과 만나다

지식생산의 독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과거의 경우는 확실히 비민주적이라고 볼 수 있다. 기술의 발달은 이렇게 ‘배운 소수 엘리트’의 손에 들려 있던 지식생산의 능력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 기술의 발달은 분명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를 초래한다. 그러나 이런 민주화는 물질의 다양성이 표출되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어떤 방향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다양성 자체를 진보라고 불러온 것이 서양의 계몽주의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술이 곧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원천이라는 생각도 절대적인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플랫폼 자본주의가 미디어성과 만나서 호황을 누리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유튜브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판단하기에 유튜브는 기존의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성과들을 계승하는 동시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된 기술이다. 한국 유튜브의 순간 접속자 수가 2018년 6월 기준으로 2500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는 이 미디어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하는 소식이다.

 

물론 유튜브에 계정을 만들고 동영상을 업로드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튜브라는 미디어성 자체가 대중성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공급자가 콘텐츠의 공급 양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자가 알아서 콘텐츠를 판단해서 수용한다. 결정권은 수요자에게 있고, 얼마나 많은 수요가 발생할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금융 자본주의와 같은 ‘운’이 지배하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술이 만들어낸 매끄러운 면은 이처럼 예측 불가능한 도약을 만들어낸다.

 

유튜브는 방송의 사유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제작 방식이 사유화되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사적인 것은 아니다. 일단 인터넷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순간, 콘텐츠는 공유 가능해지고, 복제 가능해진다. 이 지점에서 ‘소셜 미디어’는 폭발력을 발휘한다.

 

유튜브는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다소 다른 차원을 가진 미디어로, 별 다른 방송 장비를 갖추지 않아도 방송을 할 수 있으며 정보를 사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1인 미디어, 소셜미디어의 특징에 충실하다. 무엇보다 영상이라는 점에서 현장성을 뽐낸다. 사정이 이러니 유튜브는 개인이 하나씩 텔레비전 방송국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유튜브를 시청하는 경우도, 어떤 특정한 영상을 보면 그와 관련된 다른 영상들을 계속 추천해서 볼 수 있게 한다. 한 영상에서 만족한 내용을 찾지 못하더라도 다른 영상을 통해 필요한 것을 찾으면 된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유튜브 방송은 편향된 내용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에 아무래도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한 확증편향을 강화해 주는 기능을 유튜브가 할 수 있다. 이 확증편향이 소위 ‘가짜 뉴스’의 원인이다.

 

우리는 변화의 와중에 있다

기존의 미디어를 통해 형성되어 있는 성과가 없다면 유튜브가 이처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성제도가 제공할 수 없는 것이 있기에 시청자들은 유튜브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유튜브가 기존의 미디어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고 본다. 다만 기존의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졌던 구조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지식과 정보생산, 그리고 소비의 헤게모니가 유튜브로 옮겨올 것은 확실하다.

 

유튜브와 유사한 플랫폼이 넷플릭스이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영화라는 일정한 장르에 부합하는 영상물을 제공한다. 유튜브는 이를 넘어 자기의 영화를 업로드해서 관객과 직접 만날 수 있다. 유튜브가 대세가 되는 시대에 영화의 완성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완성도 높은 영화를 보려고 관객들은 기꺼이 입장료를 지불하고 영화관에 간다. 오래된 미디어와 새로운 미디어는 공존하겠지만, 주도권을 쥐는 미디어는 새로운 미디어일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우리는 변화의 와중에 있다. 앞선 미디어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유튜브에 이르러 결정적 변화가 생겼다. 이 결정적 변화는 완전한 1인 미디어의 구현이다. 누구든 진짜 같은 영상물을 만들어 보급할 수 있다. 방송국 시청률보다 더 정확하게 ‘구독자 수’가 공개되는 투명한 세계가 유튜브이다. 방송인의 인기도가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완벽한 감시의 시스템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근대는 편지의 시대였다. 인터넷이 우편을 대체한 이 시대는 반계몽주의를 내용으로 한다. 반계몽주의는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믿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안다. 다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라는 믿음이 반계몽주의의 원천이다. 그럼에도 이 반계몽주의는 계몽주의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계몽주의의 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이메일을 보내지만 여전히 편지도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닿을 곳을 모르더라도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용기가 필요한 시절이다.

 

이택광(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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