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5일(목) 연합회 강당에서 제2차 YWCA 미래가치포럼이 열렸다. 김은주 위원장(미디어소통위원회) 진행으로 양권석 교수가 <자본주의의 페르소나: 소비 사회와 윤리적 삶>을 주제로 강의했다. 제2차 포럼 강의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본 내용은 2019년 월간<한국YWCA> 9+10월호에 실렸습니다.
소비자, 상품, 욕망
소비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소비의 과정이 사람과 생명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는 사회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는 일은, 상품 소비 과정을 뒷받침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논리와 그 논리의 작동과정을 밝히는 일이라고 했다.
소비의 과정은 소비하는 주체(구매자), 소비하는 대상(상품), 그리고 그 주체와 대상과의 연결을 촉발시키는 필요 혹은 욕망 등이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연결과정을 뒷받침하는 일종의 무의식적인 논리가 있고, 그 논리가 사회적 가치와 질서를 구성하면서 우리 시대의 특별한 소비양식을 정당화해 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소비의 주체가 진짜 주체이고 소비의 대상이 정말로 필요한 상품이며, 소비의 욕망은 자연스럽고도 정당한 요구라는 일종의 왜곡된 형이상학적 토대라고 보고 있다.
물질주의적 허위의식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와 상품화 과정을 지배하는 논리, 우리가 충분한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그 무의식적인 논리와 이를 뒷받침하는 형이상학적 토대를 향한 도전을 시작할 수 있는 곳은, 사회와 개인들이 벌거벗은 물질주의 혹은 황금숭배를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것으로 포장해내는 ‘허위의식’에 대한 분석으로부터다. 가장 물질중심주의적인 삶을 살면서, 그 삶을 가리고 은폐하기 위해서 오히려 일종의 탈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허위의식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시장의 물질적 교환에 맡겨야 하고, 돈과 물질이 모든 것을 구해준다고 믿고 있는 듯한, 빈틈없이 ‘물신숭배’적이 된 이 세상에서, 사회와 개인들은 자신들이 과거보다는 훨씬 더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추구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나 환상을 갖는다. 그래서 가장 물질주의적 인간이 가장 문화적이고 문명적인 인간으로 둔갑한다. 소비자본주의 시대는 가장 물질중심주의적 시대이지만, 동시에 가장 문화적인 시대다. 상품소비의 과정을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삶의 욕망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만들어낸다.
물신화과정: 탈물질화와 자유의 타락
자본주의는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이 비물질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본주의는 유지된다. 시장의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과정은 그에 맞는 사회질서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소비의 과정을 비물질적 과정으로 포장하고 세계와 사회질서를 비물질화한다. 상품의 생산자, 소비자, 필요, 욕망 등이 엮이는 사회적 과정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 사람들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가장 표준적이고 지배적인 틀이 된다. 소비자로서의 가면을 쓰고, 그것을 연기하며 살면서, 그것이 곧 정말 사람이고, 진정한 주체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종의 소비자본주의의 소비과정이 제공하는 상상의 질서를 살아가는 상상의 공동체다. 그리고 그 상상의 공동체 안에서, 개인과 사회는 자신을 설명해내고 지켜내려고 한다.
상품화: 사회적 상형문자화
‘제품’(product)이 ‘상품’(commodity)이 된다는 것은 물질적인 재료들이 채취되고 가공되는 모든 과정, 지극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노동 과정과의 관계를 끊고 그런 과정들과는 관계없이, 시장에서 이익을 남겨줄 수 있는 물건이 되는 과정이다.
상품은 소비자에게 기능적 효용에 따르는 사용 가치로 인식되거나, 시장에서 환금화할 수 있는 교환가치로 인식되는 것을 넘어, 일종의 기호적 표현 양식이 된다. 그래서 노동생산을 일반적으로 알아보기 쉽지 않은 사회적 상형문자로 바꾸어 버린다. 일종의 탈맥락화다. 사물들의 실재와 가치는 돈이라는 시장의 교환수단을 통해서, 시장에서 유통가능한 내용이 된다. 시장을 향한 재맥락화 과정이다. 이 탈맥락화와 재맥락화 과정에서 사물과 노동의 실재적 과정에 대한 의도적 무시와 무지가 일어나면서, 동시에 상품과 상품 소비에 대한 허위의식이 만들어지게 된다.
상품선택의 자유
소비사회가 말하는 자유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생산의 과정을 의도적으로 잊어버림으로써 얻는 자유이면서, 동시에 인간관계를 희생해서 누리는 자유다.
상품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적 세계에서 모든 상품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궁극적인 상품은 돈이다. 돈은 상품이 만들어 내는 환상세계의 최고의 상품, 보편적 상품, 가장 궁극적 상품이라는 신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돈이 모든 것을 정의한다.
인생의 성패, 예술의 성패, 진리성, 아름다움, 선함, 사랑 이 모든 가치와 판단들 역시 돈에 의해서 결정된다. 결국 소비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자유는, 돈의 궁극성을 인정할 수 있게 해달라는 자유이며, 그 돈이 지배하는 세계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자유다. 인간의 모든 윤리적 도덕적 판단마저도, 인간의 자유롭고도 책임적 윤리적 판단 노력에 맡기기보다는, 돈이 지배하는 시장의 거래 과정에 맡겨야 한다는 인간에 대한 깊은 허무에 기초한 자유다.
만물이 ‘상품화’하는 세계는 모든 것이 팔 것이 되고 살 것이 되는 세계로, 사람과 사물은 물론, 유·무형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이 상품이 된다. 이제 돈은 비로소 만물의 본질이 되고, 만물은 그 본질의 표현이 된다. 그래서 돈의 초월적 위치가 확고해지고 사람들은 이 세계 안에서 결핍과 공포를 느끼면서 돈을 향한 무한추구에 뛰어들게 된다. 노동생산과정의 물질성을 망각하고, 인간관계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며, 사람과 피조물 사이의 연민이나 공감을 매우 초라한 것으로 여기면서 돈을 향한 무한추구의 자유를 주장한다.
소비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위기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공공 정책과 노동 시장의 변화 문제를 연구해온 영국의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포스트민주주의(Post-democracy)의 조건들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은 지구화된 소비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민주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첫째, 사람들이 스스로 의지를 모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설득 수단에 의해 의지가 창조되고 조작되는 시대에 들어섰다. 둘째, 경제가 정치를 지배하는 상황이다. 셋째, 개인의 원자화와 탈정치화 현상이다. 고객 혹은 소비자로서 시민은 사기업을 통해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고 만족을 얻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레저와 개인적인 소비와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소비자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사회를, 이탈리아 출신의 윤리·정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변증법 제로의 사회’라고 부른다. 진정한 의미의 이해의 충돌도, 의미의 모순과 갈등도 없고, 진정한 의미의 대화도 없는 사회다. 소비의 만족/불만족을 표현할 수는 있어도,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어려워진 사회를 말한다. 이런 사회는 결국 독재사회나 전체주의 사회다. 말하자면 시장전체주의 사회다.
결국 소비자본주의 사회란 시민이 아니라, 소비자로 구성된 사회이며 정치가 아니라 시장의 소비과정이 지배적인 참여와 표현이 수단이 된 사회다. 그 사회에서 자유는 사람과 생명의 참여를 배제한 자유이며, 나아가 시장 안에서 선택의 자유는 있을지라도, 시장 밖을 바라볼 자유는 전혀 허락되지 않는 감시체계다. 그래서 시장에서의 선택의 자유와 시장을 위한 강권정치(power politics)는 언제나 어디서든지 결합하여 인간과 생명의 소중한 관계질서를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 것이다.
소비자본주의를 무조건 거부한 채 살 수는 없다. 그렇기에 소비자본주의의 인간학과 형이상학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인 탐욕적 질서와 가치체계에 희생당하고 있는 인간과 피조물들의 고통에 보다 예리하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둘째, 인간과 소비자. 상품과 사물과 생명, 필요와 욕망과 탐욕, 그리고 자유와 경쟁, 절제와 책임 등과 같은 주제들을 함께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소비자본주의가 야기하는 고통에 대해서, 감상적인 동정을 넘어, 구체적인 연대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양권석(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