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YWCA연합회가 2020년 6월부터 진행하는 한국YWCA 정책교육(탈핵생명, 성평등, 평화·통일운동) 자료를 공유합니다.
한반도 평화, 또 다시 희망고문의 위기에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물로 6.15 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된 지 20년이 지나고 있다. 그 사이에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 많은 부침을 겪어왔다. 2018년에는 11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재개되고 최초의 북미정상회담도 열리면서 어느 때보다 평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컸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고 남북관계마저 악화되면서 한반도 평화가 또다시 ‘희망고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크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데이트 폭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을 상대로 “좋아한다”, “신뢰한다”, 심지어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대북 제재를 강화해왔다. 이런 트럼프에게 농락당했다고 여긴 북한은 ‘장기전’을 예고하면서 자력갱생 및 핵 억제력 강화를 통해 ‘정면돌파’를 다짐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전략적 착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단계적 해법’에 집착한 것이 대표적이다. ‘단계적·동시적 조처’를 골자로 하는 북한의 협상 전략은 비핵화를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지→영변 핵시설 폐기→핵물질 처리→핵무기 폐기’로 나누고는 단계별로 상응조치를 받아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 정도만 폐기하면서 제재 완화와 같은 상응조치를 받아내고는 핵무기는 폐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론에 힘을 실어주고 말았다. 핵무기 폐기의 시한과 방식은 협상 초기에 제시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북한과 “단계적 군축” 추진에 합의했던 만큼 역대급 군비증강을 자제했어야 했다. 트럼프가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김정은에게 두 차례 약속했던 만큼 이를 지렛대로 삼아 연합훈련 중단을 실천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병행 발전을 추구했어야 했다. 상호 모순적인 목표들을 추구했던 문재인 정부는 결과적으로 한미동맹과 군비증강을 우선시하고 말았다. 또한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를 둘러싼 북미간의 동상이몽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같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한국식 해법을 만드는 데 소홀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문이 닫히고 코로나19 사태 및 미국 대선을 고려할 때, 차분히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미래와 관련해 두 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한반도 핵문제 해법, 비핵지대화
먼저 한반도 핵문제의 해법으로 비핵지대를 삼자는 것이다. 비핵지대는 남북한이 “비핵지대 내” 당사자들로 조약을 체결하고, 미·중·러 등 공식적 핵보유국들이 “비핵지대 외” 당사자들로 이 조약에 참여하는 구도를 일컫는다. 이러한 접근이 필요한 절박한 이유는 비핵화의 정의 및 최종 상태를 둘러싼 북미간의 동상이몽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남·북·미는 2018년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했지만, 비핵화의 최종 상태는 물론, 정의 자체에 대한 합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비핵화의 정의와 최종 상태를 두고 헤맬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비핵지대를 비핵화의 정의와 최종 상태로 삼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다. 더구나 비핵지대는 국제법적 구속력을 확보할 수 있어 ‘지속가능한 비핵화’에 가장 부합하는 방식이다.
한반도 비핵지대의 또 다른 의의는 북핵 문제 해결에 필요하면서도 핵문제 해결이 막히면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다른 문제들 해결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미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군비 통제, 대북 제재 해결 등이 ‘동시적·병행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비핵화의 정의 및 목표 자체에도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이들 문제의 진전도 가로막혀 있다. 이에 반해 비핵지대를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로 삼으면 이들 문제의 진전도 가능해질 수 있다.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이야말로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식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4.27 판문점 선언은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해나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유엔은 비핵지대와 관련해 “지대 내 국가들의 자유로운 협상 결과에 기초”하고 “핵보유국을 비롯한 지대 밖의 국가들도 지지·협력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국제법적으로 한반도 비핵지대의 지내 내 국가들은 바로 남북한이다. 이에 따라 남북한이 비핵지대 협상에 착수하고 핵보유국들의 지지와 협력을 유도하는 방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평화협정 체결
한반도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통과해야 할 또 하나의 중대한 관문은, 남북·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이를 위한 평화협정 체결이다. 냉전 시대 가장 비극적이며 70년 가까이 ‘멈춘 상태’인 한국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하고 영구적 평화를 만드는 것은 그 자체로도 소중한 목표이다. 한반도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의 안보 증진과 세계평화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미 양국은 평화협정을 비핵화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기면서 비핵화 완료 이후나 이와 동시에 체결하는 방안이 주로 모색되어왔다. 이제는 다른 접근을 모색할 때이다. 평화협정 자체가 당사국들이 추구해야 할 공동의 목표이자 비핵화에 결정적인 추동력을 부여할 수 있는 유력한 옵션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즉,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비핵화’라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접근이 요구된다.
유념해야 할 것은 평화협정은 평화체제의 중요한 부분이지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평화체제와 평화협정의 관계는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입구론’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해 평화체제를 구축해가는 방식이다. 둘째는 ‘출구론’으로 평화체제를 거의 완성하고 나머지 과제를 평화협정에 담고 이를 법적·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셋째는 ‘중간단계론’으로 평화협정 체결에 앞서 평화체제의 일부 내용을 합의·이행하고 남은 과제를 담는 방식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2018년 남북정상회담 및 북미정상회담에서 평화체제의 일부 요소는 이미 합의되었고 남북 군사 분야 합의도 일부 이행된 상황이다. 또 평화협정 협상 과정에서 협정 체결 이전에라도 평화체제의 일부 내용을 합의·이행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평화협정 체결을 평화체제의 ‘중간단계’로 상정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북핵 해결 방안을 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문재인-김정은-트럼프 중심의 ‘톱다운’ 방식의 문제 해결은 한계에 봉착했다. 그렇다면 평화를 원하는 시민들이 적극 나서야 한다. 국내외 시민단체들이 준비하고 있는 한국전쟁 종전과 평화협정 캠페인에 참여하고 한반도 핵문제 해법으로 비핵지대에 대한 관심도 가졌으면 한다. 특히 평화가 파괴되면 가장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된다. 유엔안보리 결의 1325호가 채택된 지 20주년을 맞이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