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ywca 참여하기 포럼과 교육
성평등
[YWCA 정책교육] 이 시대의 페미니즘을 읽다 2020.06.16

한국YWCA연합회가 2020년 6월부터 진행하는 한국YWCA 정책교육(탈핵생명, 성평등, 평화·통일운동) 자료를 공유합니다.


여성운동의 범주를 총괄하는 대표적 개념어 페미니즘
최근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교회 안팎으로 전개되는 페미니즘의 확산을 보며 기독교 지인들은 내게 묻는다. “예수께서는 의인/죄인의 구도를 허무시고 유대인/이방인의 배타적 이분법도 넘어 ‘그리스도의 제자’ 인 관계적 혁명을 이루셨는데 왜 페미니즘이냐고.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들은 2016년 한 복음적인 선교 단체의 여성 간사들을 중심으로 출발한 ‘갓페미’나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며 각성한 크리스천 여성들이 온라인을 베이스로 결성한 ‘믿는 페미’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예수님 잘 믿으면 자연스럽게 모든 편견과 불평등은 사라질 텐데 ‘세상적 사상’인 페미니즘을 신앙에 접목시키려느냐, 또 수년간 문화적 정서 일반에 ‘메갈/워마드=페미=남성혐오/여성우월’의 도식이 자리잡은 마당에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꼭 고수할 필요가 있냐고 묻는다.

그 모든 오해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지난 한 세기 여성운동의 다양한 범주들을 총괄하는 대표적 개념어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적 신앙’과 만날 수 있다.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글자 그대로 ‘여성’과 ‘사상’의 복합어이다. 그러니 아주 간략하게 말하면 ‘여성들의 주장을 체계화한 이론’인 셈이다. 그렇다면 모든 여성들의 말은 다 ‘페미니즘’의 우산 안에서 소화해야 할까? 그게 좀 복잡하다. 인류 문명은 ‘성인 남자’가 공동체 안에서 공적 권위를 독점하는 ‘가부장제’로 산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그 제도를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그 제도 안에서의 여성 배치에 순응한 여성(‘거세된 여성’)이나 이에 불만을 품고 남성과 같아지려는 여성(‘명예남성’)의 주장은 보통 페미니즘의 원천자료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둘 다 가부장제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 성(性)이라는 단어를 풀어보면 ‘한 개체 생명이 가진 마음의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생명은 오묘하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유일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 익히고 깨닫고 꿈꾸는 것들을 마음에 담아 나타내는 성향이 ‘성’이다. 그런데 이 성을 소위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하여 ‘고정된’ 역할 분담을 나누어온 제도(가부장제)의 역사가 무려 5천 년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초의 남자와 여자가 ‘다른 성’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요, 염색체상으로 엄연히 다른 X인자와 Y인자를 거부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성의 구별만으로 자유의지와 창조성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있는 생명의 ‘마음의 성향’을 제한하여 통제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야말로 가장 반(反)하나님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기독교 선배들은 가부장제의 전제들과 하나님의 보편 계시를 ‘버무려서’ 전해주었다. 종교개혁 이후 성경을 다시 읽은 남자들은 여성은 남성과 ‘다를’ 뿐이지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상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지도하고 쟁취하는 남성성과 격려하고 보조하는 여성성이 서로 도우며 함께 협력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고 말이다. 진일보했으나 ‘여성’을 운명적으로 제한하기는 매한가지이다.

19세기 말 근대 유럽에서 등장한 첫 번째 페미니즘이 이런 근대/개신교 여성 담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나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태어난 생명을 신분과 성으로 나누어 제한했던 전근대 사회에 도전하며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외치며 탄생한 사회가 근대(modern) 사회이다. 그런데 ‘평등’을 외치며 차별을 무화시키던 남자들이, 유독 성차별만큼은 ‘다름’을 앞장세워 유지하고자 했다.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나 기능적으로는 위계적’이라는 개신교적 성 이해는 근대인이요 기독교인이였던 시민 남자들의 열망에 종교적 정당성을 주었다. 하지만 ‘만인의 평등’을 전제로 건설된 사회인데, 어찌 인종과 피부색을 넘어 성별 앞에서 평등을 향한 발걸음을 멈출까.

 

하나님의 보편 계시는 페미니스트적 시각을 포함하는 것
페미니즘은 알고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다. 여자를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 응시하라는 요청이다. 현 제도 안에서 법적으로 쟁취하겠다고 하는 이들이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요, 여성들끼리 제도를 다시 짜보겠다는 이들이 급진적 페미니스트이다. 소위 ‘영페미’라고 불리는 10~30대 여성들은 주로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전근대, 근대, 후기근대 사회를 반세기 안에 겪으면서 생겨난 삶과 문화의 불일치가 가장 큰 이유이다. 후기근대인인 그들은 능력에 따라 성장했지 ‘여성’으로 교육받지 않았는데, 정작 가정과 사회는 ‘아직도’ 근현대 가부장제의 틀로 여성을 바라보고,  전근대적 문화적 전제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정적인 자리’의 기회가 세대별로 크게 차이가 나게 된 경제적 조건에서 생겨난 이들 세대의 박탈감은 현 제도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가중시키기에 이들에게 설득력 있는 패러다임은 아무래도 급진적 주장이기 쉽다.

그러나 나는 여성성을 우월하다고 하거나 남성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방식으로 대안적 제도를 모색하는 것은 ‘페미니즘’일 수는 있어도, 기독교적일 수는 없다고 본다. 페미니즘이 반드시 기독교적일 필요는 없으나, 기독교가 하나님의 보편 계시를 제대로 받으려면 ‘페미니스트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잃은 양 한 마리까지 ‘우리 공동체’로 데려오신 예수께서 가르치신 복음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오래, 가장 광범위하게 배제되었던 이름인 ‘여성’은 여전히 대표성을 가지고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안에 살아 있어야 한다.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진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어내셨다. 때문에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야 인간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사람을 시대가 가면 변할 제도로 위아래로 나누고 옆에 칸막이를 그어가며 나누는 것은 결코 ‘성경적’일 수 없다. 존재론적으로 평등하다면, 기능적으로도 평등해야 한다. 조직 사회에서 기능의 위계가 있으나 그것은 능력과 재능에 따른 업무 분담이지,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분법에 있지 않다. ‘나만 살자’ ‘여자만 살자’는 것이 어찌 페미니즘이겠나.

우리가 받은 두 가지 창조 명령 즉 ‘생명을 풍성하게 살아내라!’(존재명령) 그리고 ‘연약한 생명을 살려내라!’(구원명령)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을 지켜내는 기독교적 소명이 페미니즘과 만난다면, ‘살고 살리는’ 페미니즘이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재기해” “주혁해” 그것이 제아무리 오랫동안 있어온 여성 살해에 대한 ‘상징적 미러링’이라고 해도, 생명을 향해 죽으라고 외치는 것은 그 어떤 사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 않은가.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교수)

 

YWCA 채널 구독하기

새로운 소식을 카카오톡으로
빠르게 받아보려면?👇

YWCA 채널 추가 일주일 간 표시하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