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경(청어람 ARMC 대표)
‘막장 드라마’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통용되었는지 정확한 근거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어느 때부터인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고, 나름의 계보도 생겼고, 사희의 변화에 맞춰 확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막장 드라마 장르를 개척하고, 견인해왔다고 평가받는 대표적 작가 3인방의 작품들 – SBS <펜트하우스>(김순옥), TV조선 <결혼 작사 이혼 작곡>(Phoebe), KBS <오케이 광자매>(문영남) – 이 주말드라마로 대거 편성되어 화제를 모았다. 한동안 뜸했던 막장 드라마가 다시 대중의 선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막장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의 불길한 징후’’라는 강명석 대중문화 평론가의 말을 적용한다면, 이런 흐름은 “한국사회의 불길한 정후’와도 연결된다.
‘막장화’하는 드라마
막장 드라마들의 재부상과 더불어 주목하게 되는 흐름은 요즘 방영되고 있는 거의 모든 드라마의 ‘막장화’이다. 과거에는 ‘막장’ 담당이 주로 가부장제 혹은 불의한 구조, ‘빌런’ 등 악한 인물들로 제한되었다면,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들은 그 악에 대항하는 서사에서도 ‘막장성’이 발현되고 있다. tvN <빈센조>는 마피아보다 더한 불의한 권력 카르텔에 대항하기 위해 실제 마피아 출신 변호사 빈센조를 배치했다. JTBC <괴물>에는 연쇄 살인범이라는 괴물을 은폐한 괴물같은 이들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괴물화’ 된 형사들이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tvN <마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찰서 순경이 사이코패스의 뇌를 이식받아 사이코패스가 되어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처단한다.
공적시스템 붕괴된 사회 재현
‘각자도살(各自圖殺)’의 세계관정당화
이런 흐름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공적 시스템 붕괴다. 이 드라마들은 권력마저 사유화되어 공적 시스템이 붕괴한 세계를 재현한다. 공정하게 법을 수행해야 할 사법기관은 기업과 정치의 하수인이 되고, 기업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폭력과 살인을 도모한다. 이런 세계에서는 사적 복수가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 <펜트하우스>의 모든 복수는 사적으로 자행되고, SBS <모범택시>는 아예 억울한 피해자를 대신해 복수를 완성하는 ‘사적 복수 대행 서비스’라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권력을 사유화하고 남용하는 불의한 세계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도 순진하게 여겨질 정도로 ‘각자도살(各自圖殺)’의 세계관이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펜트하우스>를 비롯한 정통(?) 막장 드라마뿐 아니라 <빈센조>같은 대중성이 높은 드라마나 <괴물>과 같은 ‘웰메이드’를 표방한 장르 드라마도 폭력적인 장면의 비율이 필요 이상으로 높다.

그래서 ‘권선정악’이라는 전통적 서사 구조는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다. 공적 시스템이 붕괴한 ‘마피아’와 같은 세계에서는 애초에 ‘선(善)’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빈센조>에서 약자의 편에서 정의를 추구하던 홍유찬 변호사나 대기업의 불법적 행위에 희생당한 이들의 유가족이 살해당한 것처럼 선은 악에 의해 허망하게 죽어버리고, ‘선’으로는 더 이상 악을 응징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게 된다.
“악마가 악마를 몰아낸다. 제가 유일하게 외우는 이탈리아 속담입니다. 예전에 말했죠? 괴물이 괴물을 상대할 수 있다고. 근데 난 괴물이 못돼요. 누군가 진짜 괴물이 나타나서 법이고 지랄이고 이 나쁜 새끼들 그냥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뭐 현실은 불가능한 거지. 빈센조 변호사님이 그 괴물이 될 순 없겠죠?”
정의롭고 선한 인물을 대표한 홍유찬 변호사의 말은 마치 “그 괴물이 되어서라도 나쁜 새끼들을 쓸어버려 달라”는 절박한 바람과도 같다. 그 말을 한 후 홍유찬 변호사는 바벨그룹에 의해 살해당한다.
매운맛 정의에 환호하는 사회
악마를 몰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심판의 권위다. <빈센조>의 악의 핵심축인 기업 이름이 ‘바벨 그룹인 건 상징적이다. 하나님이 바벨탑을 무너뜨리셨던 것처럼, 신과 같은 심판만이 바벨 그룹을 중심으로 한 ‘마피아’와 같은 절대적인 악을 응징할 수 있는 것이다. “빈센조 변호사님이 그 괴물이 될 순 없겠죠?”라는 홍유찬 변호사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빈센조는 “이건 나한태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지켜온 룰에 대한 문제예요”라며 바벨 그룹에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피의 복수를 예고한다. <모범택시> 역시 ‘악을 심판하기 위해 악이 필요하다’는 <빈센조>의 세계관과 궤를 같이 한다. ‘무지개 운수’와 범죄 피해자 지원 단체 ‘파랑새 재단’ 정성철 대표는 “악에게 지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이길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로마서 십이 장 이십일 절’이라고 적힌 사무실 벽의 낡은 액자를 비춘다. <빈센조>의 문제 해결 방식을 관통하는 말이 “내가 지 켜온 룰”이었다면, <모범택시>에서는 “나만의 방식”이라는 단어가 핵심 키워드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런 드라마를 “사이다 서사” “매운맛 정의”라고 부른다.
<모범택시는> 이런 심판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직화한다. 공적 시스템이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 상황에서 사적 복수를 대행하는 업체인 ‘무지개 운수’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사업(?)은 의뢰자가 게임 화면에 접속하여 의뢰 버튼을 누르면 업체는 주저함 없이 게임을 하듯 복수를 실행한다.
드라마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거울은 사법 농단, 아직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참사, ‘LH 사태’로 대표되는 공정성의 붕괴처럼 선과 악의 경계도 사라지고, 공적 시스템의 개념도 무력화된 혼란스러운 사회를 비추고 있는게 아닐까?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식은 불가능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이 더 효과적이고, ‘히어로’는 ‘안티 히어로’로 대체된다. 결국 정의의 기준이나 상식의 선을 넘어서는 ‘나의 룰’과 ‘나의 방식이 더 강력하게 작동하며 안티 히어로가 심판의 당위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가 점점 극단화하는 이유는 정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정의’가 어지럽게 초과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게라도‘ 해야 할 정도로 세상이 더나빠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유효하지만, 찜찜함도 공존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악을 심판하기 위해 악이 필요하다’는 서사 다음에는 어떤 서사가 놓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