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신애(연합회 실행위원, 목사)
기괴하고 이상하다 그러나
별생각 없이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끊을 수가 없어 6편을 내리 보고 말았다. 상상 이상의 꾀한 풍경이 폭죽 터지듯 연달아 펼쳐지는 통에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 드라마는 낯설고 이상하다. 보지 않고는 그 이상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두 번을 더 봤다.
안은영은 젤리(일종의 엑토플라즘, 심령체의 물질화 현상)를 보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젤리는 때가 되면 부서지지만 어떤 젤리는 다른 존재를 해친다. 아무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구하는 운명을 타고난 그녀는 손에 비비탄 총과 무지개 야광검을 들고 나름 진지한 싸움을 이어간다. 목숨을 건 전투 끝에 학교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주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그녀의 투쟁은 하찮고 귀엽다. 알아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
오래 봐야 예쁘다더니 안은영도 그렇다. 삐죽 뻗은 단발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심드렁한 표정에 엉뚱한 대사가 처음에는 까끌까끌 하더니 두 번 보고 세 번 보니 마침내 사랑스러워졌다. 결국 이경미 감독이 시청자들에게 공들여 보여주고 싶었던 세계는 아마 그런 거였나보다. 서툴고 끔찍하고 보기 싫은데 알고 보면 어쩔 수 없는 삶의 진실을 품고 있는, 애처롭고 안아주고 싶고 사랑스러운 그런 것들 말이다.
“(젤리를 시각화할 때) 기괴하고 혐오스럽지만, 귀엽고 또 보고 싶기도 한 경계를 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겪어보는 난감한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욕심이었다.”(이경미 감독 인터뷰 중)
넷플릭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은 원작소설과 달리 은영이 자신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직업적 소명의식을 갖게 되는 성장 드라마로 기획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특함’에 따라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제각기 보이는 풍경에 따라 인생의 길을 결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타고 난 영특함으로는 충분치 않다. 세계는 넓고, 아무리 살아도 아직 보지 못한 풍경이 너무 많다. 그래서 다 큰 어른도 계속해서 성장한다.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어린 시절 나도 꽤 영특한 아이였다. 아이답게 떠들고 까부는 것보다 관찰하고 읽는 편에 더 빨리 성장했다. 내가 ‘여자 취급’을 싫어하며 자란 건 그래서인 것 같다. 누군가를 ‘아이’로 대하지 않고 ‘여자아이’로 대할 때는 좋은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고무줄이 끊기거나 공깃돌을 가로채이거나 치맛단이 들춰지는 건 개중 단순한 축이었다. 내가 동의한 적도 없는데 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정해져 있었고 거기서 벗어나면 별나 보였다.
나는 그냥 별난 아이로 살기로 했었다. 화장이나 옷, 살림 등에 별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부러 멀리하기도 했다. 여자아이가 되지 않으면 ‘보통의 인간’으로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도 실은 꽤 즐겁다는 걸 나이 마흔을 넘겨서야 알게 됐다.
원래 가난과 착취, 질병과 차별은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가진 사람들은 모르는 걸 못 가진 사람만 안다. 편한 사람들은 모르는 걸 불편한 사람만 안다. 가해자와 방관자는 모르는 걸 피해자와 연대자는 온몸과 온삶으로 알 수밖에 없다. 한 번 눈이 뜨이면 다른 것도 계속 따라 보인다.
성차별은 알았어도 성폭력은 몰랐다. 대학시절 성폭력 피해자인 친구를 만나고 난 뒤로 나는 내가 꽤 운이 좋은 여자아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성소수자인 이웃과 친구의 커밍아웃을 겪은 뒤 내 안에 있었던 편견들이 계속해서 부서지고 있다. 청사 앞 줄지어 늘어선 농성 천막들을 방문했던 날 나의 광화문 풍경이 바뀌었다. 깨끗한 상가와 아파트 단지를 보면서 쫓겨난 사람들을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투명하기만 했을 거대한 추모 물결의 젤리에 뒤흔들리는 세계를 보았다. 암만 원색의 강렬한 조끼를 입고 목이 터져라 소리쳐도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볼 수 있어도, 볼 수 없어도 확실히 있다.
화사한 세상에 눈이 길들여져서는 곤란하다
차별과 폭력을 알아갈수록 내가 보는 세상은 조도가 낮아지고 점점 선명해진다. 날아오는 공에 맞지 않으려면 공을 끝까지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화사한 세상에 눈이 길들여져서는 곤란하다. 어차피, 자꾸 보면 낯설지 않다. 나의 페미니스트 선생님은 그런 게 ‘피억압자의 인식론적 특권’이라고 했다. 특권이라니 기분은 참 좋은데 가끔은 우리만 자꾸 슬프고 지치는 게 억울하다.
“누가 너를 이 세상에 자꾸 보내는거냐”고 멱살잡이라도 하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이제는 문득 강선(남주혁 분)이 떠오를 것 같다.
강선 : 내 말은. 다치지 말고 유쾌하게 가란 말이야. 사람들한테 사랑받으면서 살라고.
얼마나 훌륭하면 우리한테만 보이는 소름끼치고 끔찍한 진실 앞에서 안은영은 명랑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얼마나 현명하면 방금 전까지 젤리와 ‘신나 뼈빠지게’ 싸워 놓고 “이것은 요즘 유행하는 줌바댄스였다”며 머쓱하게 웃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우리 쌈닭들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람들한테 사랑받으며 살 수 있는 걸까?
일단 내 앞에는 하나님이 열어 두신 문이 있다
내 지난 시간에 빠르게 휙휙 바뀌어 온 풍경들을 되짚어 보면 이쪽에서 세상으로 달려가는 건지 세상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건지 헷갈린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이 쌩쌩 달리는 것들이 부딪혀 벌어지는 교통사고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증인 즉 ‘본 사람들’이다. 본 것을 본 대로 말하고, 본 것을 외면하지 않을 사명을 품은 사람들이다. 땅끝까지 가서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생각해 보자. 또 박해의 시대를 건너가던 사람들에게 주신 묵시의 말씀을 기억해 보자.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3:8)”
아모르파티(Amor fati, Love of fate). 일단 내 앞에는 하나님이 열어 두신 문이 있다. 그 풍경을 충분히 탐색하고 힘껏 껴안아도 보고 용감하게 사랑해 볼 일이다. 낯설 때는 두렵고, 두고 보면 사랑스러운 그것들과 함께 춤추는 것이 바로 우리의 결정적 사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