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wca 웹진

21세기 여성들은 어떤 ‘이야기’를 원할까

글: 오수경(청어람ARMC 대표)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가장 뜨거웠던 단어 중 하나는 ‘장례’가 아니었나 싶다. 지난 7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친상은 장례 기간 내내 화제가 되었다. 여성 비서를 성폭행한 죄로 복역 중인 이에게 대통령의 이름이 박힌 조화가 전달되었고, 주요 정치인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그 장례는 ‘안희정 권력의 쇼룸’ 역할을 했다. 그렇게 전시된 풍경은 피해자 김지은 씨를 비롯한 동시대 여성들에게는 사라지지 않는 위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논란이 가시지도 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장례를 둘러싸고 또 한 번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운운하며 정작 살아있는 피해자를 향해 2차 가해를 서슴지 않는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이 상황은 ‘21세기’를 살고자 하는 동시대 여성들을 향한 ‘20세기적 폭력’에 가까웠다. 나에게 두 번의 장례는 실제적 의미를 넘어 20세기와 21세기를 구분 지을 상징적 사건으로 각인되었다. 이 소란스러운 과정을 경험하며 우리는 비로소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진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장례식
또 하나의 ‘장례’를 이야기하고 싶다. 무려 21년이나 지속된 KBS2 <개그콘서트>(개콘)가 지난 6월 26일 방송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개그 프로그램의 폐지를 장례에 비유하는 게 어색하지만,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듯, 출연진은 마지막 회 한 코너를 아예 장례식장으로 설정했다. 모두의 시절에 청춘이 존재하듯, <개콘>이 빛나던 시절도 있었지만 <개콘>도 서서히 늙어갔고, 대중은 그 ‘늙음’을 견디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콘>의 ‘낡음’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징후는 꽤 오래전부터 감지되었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한 플랫폼의 변화가 본격화되기도 했지만, 장애인이나 외국인 등을 희화화하거나 여성이나 타인의 신체를 비하하며 혐오를 조장하는 걸 ‘개그’로 즐기길 거부하는 대중이 많아진 것이다. 한때 회자하던 “개그는 개그일 뿐 오해하지 말자!”라는 <개콘>의 유행어가 더는 통하지 않았다. 대중은 아무리 개그라도, 그런 이야기를 더는 원하지 않을 정도로 변화했다.

 

KBS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개그우먼’(출처: KBS)

국내최초 여성 스탠드업코미디크루 블러디퍼니 첫 정기공연 포스터 (출처: 텀블벅)

한 시대의 종말은 다른 이야기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개콘>의 마지막 회가 방영될 즈음, KBS1 <다큐인사이드>에서는 ‘개그우먼’ 편을 방영했다. 예쁘면 “개그우먼인데 왜 예쁜 척해”라며 외면받고, 못 생기면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못생김’ 자체를 개그 소재로 삼아야 했으며, 남성들이 만든 판 뒤에서 위태롭게 분투해야 했던 개그우먼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담아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이 프로그램은 이들의 애환을 공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들이 어떻게 대중의 변화를 읽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는지 의미를 정확하게 짚었다. “내가 잘해야 후배들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악착같이 버틴 이성미를 비롯한 선배 개그우먼들, ‘비호감’ 캐릭터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박나래, 공중파 방송에서는 자신들을 불러주지 않아 스스로 ‘판’을 만든 송은이·김숙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스스로 만든 길과 성취는 지금-여기 대중문화의 지향이기도 하고, 한국 사회 속 여성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변화는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공중파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중심은 여전히 남성들일지 모른다.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는 분명 시차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중은 그 시차를 빠르게 극복하며 미래로 질주한다. 이들은 더는 TV 리모컨을 손에 들고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TV가 트로트를 반복 재생하고, 이성애 중심 연애·가족 서사가 지긋지긋하게 우리 주변에 맴돌 때 ‘21세기 여성’들은 넷플릭스나 왓챠를 비롯한 새로운 플랫폼으로 망명하고 있다. 그곳에서 안전하고 흥미로운 ‘여성 서사’를 발견하며 향유하고 있다. 송은이·김숙과 같이 이런 변화를 감지한 명민한 창작자들은 스스로 판을 벌여 함께 즐길 수 있는 대중문화를 개척하고 있다.

 

이들이 앞장서서 판을 벌인 효과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 박나래는 ‘스탠드업 코미디’ 분야에 진출했고, 최근에는 국내 최초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크루 ‘블러디 퍼니’가 탄생했다. 박미선도 개그우먼의 한계를 넘어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 것도 모자라 현재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동료 개그맨이자 남편인 최양락의 그늘에 가려졌던 팽현숙은 JTBC <1호가 될 순 없어>에서 요리사이자 개그우먼으로 재발견되고 있다. 그동안 대중문화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박원숙을 비롯한 황혼의 여성 배우들이 KBS2 <같이 삽시다>를 통해 주목받게 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배구선수 김연경, 전 국가대표 골프선수 박세리 등 ‘운동하는 언니들’이 예능의 새 강자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그동안 남성들의 무대로 여겨지던 힙합 분야에도 슬릭, 이영지 등 ‘굿걸’들이 등장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변화는 MBC <놀면 뭐 하니>의 ‘싹쓰리’의 등장과는 다른 흐름이다. ‘싹스리’가 기존 시스템을 등에 업고 과거를 반복하며 향수를 자극한 것이라면, 여성들이 만든 판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되고, 확장되고, 선순환하고 있다. 이들에 의해 소위 ‘알탕 예능’이라 불리던 남성 중심 콘텐츠는 점점 대중의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 <여자들은 먼저 미래로 간다>의 공저자 윤이나는 대중문화의 변화를 이렇게 진단한다.

 

“이미 여성들은 밖에서 판을 만들고, 안에서 싸우고, 동료로서 팬으로서 여성으로서 서로를 지지하며 다른 것을 만들고, 다른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게으르게 과거에 머물며 변하지 않는 남성들의 세계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여성들은, 과거에 머무는 이들의 눈에는 미래에 사는 것이겠지요. 이건 어쩌면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더 나은 삶과 미래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고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먼저 오는 것이니까요.”

 

변화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고” 먼저 미래로 달려가는 이들에 의해 느리지만 확실하게 온다. 최근 경험한 세 번의 ‘장례’가 상징하듯 시대는 변하고, 대중의 지향도 바뀌고 있다. 이런 지향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변화하기를 거부한다면 <개콘>처럼 늙고, 낡아 장례를 치를 날이 당겨질 수밖에 없다.

 

YWCA 채널 구독하기

새로운 소식을 카카오톡으로
빠르게 받아보려면?👇

YWCA 채널 추가 일주일 간 표시하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