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평론가, YWCA 좋은미디어상 심사위원)
2020 대중문화계 키워드 ‘재난’, ‘생존’
2020년을 관통한 하나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단연 ‘재난’이다. 연초에 발발한 코로나19 감염병은 곧 전 세계적인 범유행으로 발전했고 그 상처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대중문화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 시즌2를 비롯해 영화 <부산행>의 속편인 <반도>와 <살아있다> 등의 좀비물,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의 크리쳐물 <스위트홈>까지 아포칼립스물이 유독 큰 호응을 얻었다. tvN <방법>, OCN <경이로운 소문>,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과 같이 초자연적 괴물들이 출몰하는 오컬트물에도 재난과 종말의 상상력이 녹아 들어가 있다. 여기에 웹시리즈 <가짜 사나이>, KBS <재난탈출 생존왕>, tvN <나는 살아있다> 등 생존 예능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2020년의 대중문화계는 ‘재난과 생존’의 키워드가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는 재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같은 재난 소재 콘텐츠의 유행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예견했다기보다 기후위기, 환경 재앙과 같은 대재난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일상화된 시대의 증후에 가깝다. 다만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작품들이 2020년의 재난 현실과 의미심장하게 맞물리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다. 즉 ‘우리 공동체는 재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흔히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크게 각자도생과 상호연대라는, 두 가지의 대조적 태도로 나타난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이러한 연대의 가치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세계는 이 감염병을 막기 위해 협력을 최우선으로 하기보다는 차단과 격리에 더 집중했고, 이 과정에서 타인을 향한 혐오가 무차별적으로 확산되었다. 매우 인상적이게도, 2020년의 재난물은 한층 강한 연대의 서사로 이 같은 현실의 폭력에 대응한다.
대표적 사례로 좀비 아포칼립스 서사를 조선 시대 배경으로 옮겨온 <킹덤>은 엄격한 신분제의 장벽 때문에 오히려 연대의 가치를 더 강조할 수 있었다. 눈여겨볼 지점은 연대의 드라마를 써나가는 주체들이다. 보통의 재난물에서 영웅적 주인공의 활약이 크게 부각되던 것과 달리, 최근 작품들은 주로 평범한 소시민과 약자들의 연대를 그린다. 가령 영화 <반도>는 해군 특전 대위 출신으로 기존 재난물의 히어로가 될만한 재질을 지닌 정석(강동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그의 영웅적 면모가 아니라 타인과의 강한 유대에 초점을 맞춘다. 4년 전 좀비 바이러스로 뒤덮인 한국을 가까스로 벗어났다가 모종의 임무를 띠고 돌아온 정석은 위기 상황에서 민정(이정현)의 가족을 만난다. 여자아이 둘, 노인, 그리고 여성으로 구성된 민정의 가족은 전형적인 재난 취약계층임에도 구조가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도움을 받은 정석은 그들과 함께 반도를 탈출하고자 한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각자도생을 넘어 약육강식의 논리를 설파하는 황중사(김민재) 일당이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의 땅에서 정석과 민정 가족의 연대는 황중사 일당의 압도적인 물리적 힘을 이겨내며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출구의 희망이 된다.
<스위트홈> 타인과 공존하는 길을 택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최근의 재난물 가운데 제일 흥미로운 작품은 <스위트홈>이다.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감염으로 인해 인간들이 하나둘 괴물로 변해가면서 문명이 초토화되어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무너져 가는 낡은 아파트 그린홈 거주자들의 생존을 위한 사투를 따라간다. 학교폭력 피해자이자 끔찍한 사고로 가족을 잃은 현수(송강), 방화범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악인을 처단하는 살인청부업자가 된 상욱(이진욱), 고아 출신의 고등학생 은유(고민시), 시한부 환자 길섭(김갑수), 천식을 앓는 간병인 유리(고윤정), 하반신 장애를 지닌 두식(김상호) 등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고립되고 소외된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전대미문의 재난 상황 앞에서 역으로 단절을 벗어나 타인과 공존하는 길을 택한다. 말하자면 <스위트홈>은 앞서 언급한 2020년 재난물의 질문, 즉 ‘공동체는 재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가장 적극적으로 ‘연대’라 답하는 작품이다. “살아남은 우리는 같이 있어야 됩니다. 부디 1층으로 내려와 주세요.” 냉철한 전략가적 면모 덕에 그린홈 생존자 그룹의 리더 역할을 맡게 된 은혁(이도현)이 아파트 안내 방송을 통해, 각자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은 거주자들을 향해서 건네는 말은 이 드라마의 주제를 요약하고 있다. 주요 인물들은 은혁의 말처럼 방 바깥으로 나와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세상에 상처받고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두었던 현수는 괴물로부터 위협당하는 어린아이들을 구하려 바깥으로 발을 내딛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무장했던 두식 역시 다른 이들을 위해 무기를 만든다.
그리하여 1층에 하나둘 모인 생존자들은 남은 식량을 나누고 상호격려하며 일종의 재난공동체를 형성해나간다. 부모를 잃은 어린 남매가 공동의 돌봄 아래 놓이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모습은 서로를 불신하고 갈등했던 재난 이전의 상황보다 더 안정적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지점은 바로 옆에 있던 이가 감염자가 되어 언제든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가 인간성을 모두 잃기 직전까지 기다려주는 태도에 있다. 기존의 감염재난물이나 좀비 아포칼립스물은 증상의 빠른 진행 속도로 인해 감염자들과 비감염자 사이에 재빨리 명확한 절취선이 그어진다. 반면 감염되어도 ‘괴물화’가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이 작품의 독특한 설정은 공동체가 인간과 괴물의 경계를 질문하고 인간의 존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
예컨대 차츰 ‘괴물화’되어 가는 현수의 존재는 처음엔 생존자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지만, 주민들 대신 위험한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그의 모습은 곧 공동체의 반성을 이끌어낸다. 남은 자들도 점점 이타적으로 바뀌어 간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한 사랑은 없나니 너희가 주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주의 친구라.” 극 초반 이웃을 구하기 위해 괴물과 맞섰던 국어 교사 재헌(김남희)이 신을 향해 빌었던 연대의 기도는 마지막에 이르면, 절망적인 시대를 향한 이 드라마의 간절한 기원으로 다가오게 된다. 실제로 재난공동체의 공고한 연대와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추는 <스위트홈>의 독특한 설정은 크리쳐 아포칼립스물의 화려한 스펙터클이 주는 쾌감에 익숙한 서구의 시청자들에게도 감동적인 차별점으로 호평받고 있다.
좋은 드라마는 현실의 그림자를 정확하게 응시한다. 2020년의 재난물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어둠이 짙게 드리운 이 시대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이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