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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화 생명으로 오시는 예수

김진희 목사(애신교회)

이사야 11장 1~9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오늘 우리는 두 주 일찍 성탄절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는 기억하며 기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 은총의 사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이 오늘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해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기억하며 기념하시겠습니까?

저는 요즘 많은 시(詩) 속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그 중 정호승 시인의 [지푸라기]라는 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고마운 지푸라기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지푸라기는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고 세상을 무작정 떠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기다리는 것이랍니다. 인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려 주저앉아 우는 이에게 미력하게나마 힘이 되어주길 기다리는 지푸라기는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 섞인 진흙이 되어 마침내 흙벽돌로 빚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허물어진 사람이 머물 집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김기석, 『아! 욥』 꽃자리, 2016. p.131,132) 이 시를 묵상하다 보면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푸라기처럼 여겼던 그분,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며, 그 사랑을 깨달은 자들의 사랑의 실천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이웃의 희망이 된다는 것이 저의 신앙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삶이란 신비로운 종교체험이나 금욕생활 그리고 한계를 극복하는 자기 증명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실존주의 작가이며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가리켜 ‘Homo Viator'(호모 비아토르)라고 정의합니다. 번역하면 ‘길 위의 인간’ 또는 ‘순례자’라는 말입니다. 마르셀이 생각하는 인간은 ‘마음에 근원적인 그리움을 품고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을 수 없는 사람, 일어나 다시 걷는 희망의 사람입니다. 즉 잘못된 가치관과 선택이 빚어놓은 현실에서 돌이켜 정의, 평화, 생명의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1. 정의로 오시는 예수님
이사야 11장을 보면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십니다. 정의는 평화의 세상, 하나님 나라의 전제조건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롤스는 정의(justice)를 ‘무지의 장막’이라는 가상 실험을 통해 정의(definition)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남자일지 여자일지, 흑인일지 백인일지, 부자일지 가난한 사람일지, 장애인일지 비장애인일지 모르는 무지의 장막 안에 있습니다. 그 장막 안에서 사회의 제도나 법들을 판단해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무지의 장막의 가상실험에 내가 미생물일지 인간일지, 동물일지 인간일지, 식물일지 인간일지 모른다는 가정을 첨가해봅니다. 무지의 장막을 벗어나는 순간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생각, 어떤 판단,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요?

 

코로나19와 혹독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우리에게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일상이다.”라는 말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우리의 일상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외출도 만남도 불편하고 어렵습니다.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고맙고 감사한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코로나19시대는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라 닥친 것이기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미지의 낯선 현실이기에 두렵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살펴보면 해결의 방향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상황은 인간이 자초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생물학자 최재천교수의 말입니다.

 

“저는 원래 상황을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에요. 하지만 코로나19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이건 순전히 우리가 저지른 일입니다. 자연을 그대로 두었다면 동물의 몸에 살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올 이유가 없죠.”

 

인간이 저지른 일을 극복하려면 그 일을 저지른 인간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낯선 현실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얍복강가의 야곱처럼 씨름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의 의미를 물어야 하고,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물어야 하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물어야 합니다. 홀로, 밤을 새우며, 날이 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고 겨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엉덩이뼈가 어긋나 절뚝거리는 것이 야곱에게 축복이었던 것처럼, 오만한 인간중심 문명의 엉덩이뼈가 상처를 입고 휘청거리는 코로나 시대가 오히려 새로운 문명을 세울 기회가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 새로운 문명은 인간이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문명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하늘과 땅이 통합된 문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요청하고 깨닫게 한 코로나 시대를 “브니엘”이라 명명하게 될 것이며, 이전처럼 살 수 없기에 절뚝거리며 걷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생의 활력을 주실 것입니다. 마침내 코로나 시대의 나루를 건너 새로운 문명의 입구인 브니엘을 지나가는 우리에게도 해가 솟아올라 비춰줄 것입니다.(이민재, 은명교회, “코로나의 나루를 건넌 사람들” 설교 참조)

 

2. 평화로 오시는 예수님
모든 자연 안에 정의가 실현될 때 평화의 세상이 옵니다. 평화는 하나님 나라의 지향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렇다면 인간관계 속에서 평화는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요?

 

박노해 시인은 자신의 인생에 유일했던 사교육 경험은 일곱 살 때, 보리 한 말 주고 다닌 서당 석 달이 전부라고 합니다. 흰 수염에 검은 갓을 쓴 서당 선생님은 첫날 무릎을 꿇어앉은 그에게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박기평입니다.” “터 기(基)에 평화 평(平)자, 평화의 기틀이라…. 사람의 이름이 뭔 줄 아느냐?” “……..” “이름은 너를 일으켜냄이고, 이름은 네가 이르러야 할 길이니라.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예, 터, 평화, 평화의 터를 이루는 길입니다.” 선생님은 동그란 안경 너머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럼 길이 뭔 줄 아느냐? 길은 도(道), 보아라.” 선생님은 먹을 갈고 붓을 들어 글씨를 쓰셨습니다. “길 도(道)는 머리 수(首)를 베어 창으로 꿰들고 열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길은 무섭고도 잔인한 것이란다. 일본 놈들이 여기까지 신작로를 열 때 얼마나 많은 사람과 나무와 생명의 목을 베었겠느냐?” 어린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길 도(道)자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너는 네 이름대로 평화의 터를 이루는 길을 어떻게 열어가야 하느냐? “평화를 해치는 나쁜 사람들 목을 쳐야 하나요? “기평아” “예” “내가 먼저 평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평화의 세상을 이루어 갈 수 없단다. 길을 잃거든 네 빳빳한 목을 쳐라. 그러면 평화다.” 어린 그는 온몸을 떨었습니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석 달 동안 배운 천자문 그보다 천배는 소중한 첫날의 가르침은, 그가 길을 잃을 때마다 길이 되었고, 수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서당 입문 첫날, “길을 잃거든 빳빳해진 네 목을 쳐라!”라고 들었던 생생한 그 전율은 아직까지 그의 안에 살아 있다고 고백합니다.

 

해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하는 이유는 우리 안의 폭력적 구조를 끊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구조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불의로 점철된 폭력의 구조를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 평등의 구조로 바꿔야합니다. 우리 내면의 개혁은 그 분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일 때, 그분이 우리 안에 태어나실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그분이 태어나시도록 간절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3. 생명으로 오시는 예수님
생명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입니다. 김지하씨의 『생명과 자치』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가 마침 봄이었는데 어느 날 쇠창살 틈으로 하얀 민들레 꽃씨가 감방 안에 가득히 날아 들어와 반짝거리며 허공중에 하늘하늘 날아다녔습니다. 참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쇠창살과 시멘트 받침 사이의 틈, 빗발에 패인 작은 홈에 흙먼지가 날아와 쌓이고 또 거기 풀씨가 날아와 앉아서 빗물을 빨아들이며 햇빛을 받아 봄날에 싹이 터서 파랗게 자라 오르는 것, 바로 그것을 보았습니다. 개가죽나무라는 풀이었어요. 새삼스럽게 그것을 발견한 날 웅크린 채 소리죽여 얼마나 울었던지! 뚜렷한 이유도 없었어요. 그저 ‘생명’이라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신선하게, 그렇게 눈부시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한없는 감동과 이상한 희열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 나는 이 ‘생명’이라는 말 한마디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읽어 온 모든 종교경전과 과학서적의 내용이 다 생명이란 말 한마디에 연결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인간은 사회와 함께 지구와 우주의 전 생명계에 연결된 전체적인 생존이므로 자신과 함께 이웃과 자연 생명을 파괴와 죽임, 즉위적인 살해로 부터 살려내야 하고 또 그것이 도리어 자기 자신을 살리는 길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글에서 저는 생명의 능력을 봅니다. 기독교의 존재 이유는 참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의 생명력으로 세상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죽음조차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우리에게도 충만히 흐르기를 원합니다.

 

생명은 성장하고 변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당대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질을 사멸성으로 볼 때 한나 아렌트(Hanna Arendt)는 인간에게는 사멸성에 맞서는 건강한 ‘탄생성’(natality)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탄생성’을 이야기하며, 인간이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건 ‘용서의 능력’과 ‘약속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용서로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할 수 있고 누군가를 용서함으로 끊임없이 탄생합니다. 오은영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는요, 아이에게 생명 그 자체예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이의 생존을 도와요. 절대적이죠. 아이는 자기를 위해서 부모를 용서해요. 본능이죠. 아이는 부모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부모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 손을 놓아도 아이는 금세 다시 잡아요. 금방 용서해줍니다. 아이의 용서가 어른을 죄책감에서 구원해요. 참으로 위대한 힘이죠.” 어쩌면 아이의 용서 덕분에 부모는 늘 새로 시작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가 매일 자라 어제와는 또 다른 아이가 되듯, 부모 또한 그날의 용서를 받아 어제와는 또 다른 부모로 태어나게 됩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변화의 시대를 이끌어 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한국 YWCA가 새로운 시작을 요청하는 세상에 희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벼랑 끝에 선 자들에게 만만한 지푸라기 한 번 되어 보겠다고 다짐하는 여러분 가운데 아기 예수의 탄생의 기쁨이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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