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나영(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박종주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정해진 관련 법의 개정 시한이 이제 불과 5개월여 남았다. 올해 12월 31일까지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 관련 조항과 모자보건법 등 관련 법의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선 지금까지 임신을 중지한 여성이나 이를 도운 의료인 등을 처벌해 왔던 근거 조항들은 법적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서 임신중지에 관한 결정은 헌법이 보장하는 자기결정권에 해당하며 “자기결정권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생활영역에서 인격의 발현과 삶의 방식에 관한 근본적인 결정을 자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권리”라고 정의하고, 국가는 이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남은 시간 동안 정부와 국회는 이와 같은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는 개정 법률안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 법적 처벌은 임신중지율을 낮추는 데에 아무런 효과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여성들을 더 위험하고 열악한 상황으로 몰아갈 뿐이라는 사실이 이미 지난 40여 년 동안 세계 각국의 통계를 통해 증명되었다. 이제 정부와 국회가 남은 5개월여의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은 임신중지의 전면 비범죄화와 함께 성교육, 성건강, 성관계,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 양육 등 제반의 관련 영역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차별이나 낙인 없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적, 의료적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이 글에서는 이를 보장하기 위한 법·정책 과제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의 의미
앞에서도 강조했듯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임신 당사자 스스로가 결정한 임신중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벌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일각에서는 처벌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고 임신 12-14주, 이후 22주 혹은 24주까지, 그리고 그 이후 시기 정도로 임신 시기를 구분하여 초기에는 누구나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이후에는 제한적인 조건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는 오히려 더 안 좋은 상황을 초래할 뿐이다. 한국보다 먼저 임신중지를 합법화한 여러 나라들의 경우 30-40년 전에 이러한 방식으로 법적 제약을 두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제약 조건이 효용이 없을뿐더러 당사자에게 더 불평등하고 열악한 상황만을 초래할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관련 제약들을 없애고 있는 추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8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도 임신중지 경험이 있는 응답자의 95.3%는 임신 12주 이내에 임신중지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시기는 임신 6주차 정도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의 건강에 미칠 영향과 태아의 성장을 고려하여 여건이 된다면 누구나 되도록 이른 시기에 임신중지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 개정의 중요한 방향은 ‘언제부터, 어떻게 처벌할 것이냐’가 아니라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어떤 시기에, 무엇을 보장할 것이냐’가 되어야 한다. 초기 임신중지일수록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를 포함하여 모든 방법이 가능하도록 보장하고, 보험 적용과 의료기관 등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한편, 임신중지 시기가 늦어지는 경우에는 최선의 의료적 선택지와 건강에 미치는 영향, 분만을 하게 될 경우의 지원사항이나 고려사항 등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상담의 질을 높이고 이에 개입하는 의료 전문인의 기준을 높이는 방향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임신 기간에 따른 허용 사유를 구체적으로 열거할수록 입증 요건이 많아지고, 성폭력이든 사회경제적 사유이든 이를 입증하는 것은 과도한 절차를 요구하여 오히려 임신중지 시기를 늦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어떤 시기, 어떤 이유에서라도 처벌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임신중지에 대한 판단은 어떠한 시기에든지 임신중지의 필요성에 대한 여성의 진술과 요청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하여 의료적 지원 방향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
유산유도 약물의 승인 그리고 건강보험 적용
한편 안전한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접근권을 높이기 위해 유산유도제 도입이 시급하다. 유산유도제인 미페프리스톤은 이미 전 세계 67개국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하여 사용되고 있고, 2005년에는 WHO에서 필수의약품으로 지정되었다. 더 이상 여성들이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은 약을 개별적으로 복용하여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루 빨리 공식적인 의료 체계를 통해서 복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보건의료인들이 임신중지에 관한 최신의 의학 정보와 사전/사후 건강 관리, 정보제공과 상담에 관한 가이드를 꾸준히 향상시키고 공유할 수 있는 보건의료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각 지역에 산부인과와 가정의학과 등 관련 의료 기반을 확충하고 피임과 임신중지 또한 건강에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이를 필수 공공의료 행위로 인정하여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현재 합법적인 임신중지가 가능한 34개국에서 정부나 공공기관 재원, 건강보험 재원으로 보험지원을 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이나 저소득층 등의 경우 전액 혹은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피임과 임신중지에 대한 보험적용은 비용으로 인한 접근성의 문제를 해소해 줌으로써 당사자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합병증이나 모성사망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안전하고 평등한 보건의료, 사회 여건 만들기
마지막으로, 아동/청소년, 이주민/난민, 장애인 등 정보와 의료기관 접근성이 취약한 사람들의 접근성을 확대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와 자료 제공, 의료 환경 개선을 위해 관련 정책과 제반 시설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형법상의 ‘낙태죄’를 통해 임신중지 처벌을 명시하는 한편 모자보건법 14조를 통해서는 장애나 질병이 있는 사람들의 임신중지는 법적으로 허용해왔다. 명분은 임신중지의 제한적 허용 사유였지만, 이는 사실상 장애나 질병이 있는 이들의 출산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해 온 것이다. 때문에 지금까지는 비장애인 여성, 청소년 여성 등은 처벌이 두려워 위험한 조건에 내몰렸고 장애인 여성은 오히려 “정말 출산을 할 거냐”는 압박 속에 때로는 강제 불임이나 유산 시술까지 받아야 했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식의 선별적 처벌-허용 구도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더 많은 평등이다. 이제는 누구나 평등하게, 폭력이나 낙인 없이 성에 관한 정보와 교육을 받고, 관계를 맺으며,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 양육 모든 영역에서 의료적, 사회경제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기이다. 그 시작에 함께 힘을 모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