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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여성 교류 30년, 돌아보고 내다보다

최수산나(한국YWCA연합회 부장)

 

 

지난 6월 2일(수) 청년문화공간 주(JU)에서는 남북여성교류의 시작이 된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개최 3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역사적 현장에 참여했던 여성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가졌다. 약 80여 명의 여성들이 참석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한반도 평화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구적 역사를 열어온 남북여성들

30년 전인 1991년 남과 북의 여성들은 만남과 교류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판문점을 직접 통과하여 서울과 평양에서 공식화된 만남과 토론의 자리를 가졌고, 이 선구적 만남은 국내 여성평화통일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여 금강산 방문 및 경제교류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 1998년이니, 그보다 훨씬 앞서 군사 분계선을 넘어섰던 최초의 민간교류주역들이 바로 남북의 여성들이었다. 2015년 글로리아 스타이넘, 리마 보위 등 국제여성들이 DMZ를 통과해 북에서 남으로 걸어내려온 일은 전혀 생소한 첫 경험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30년 전 남북만남의 성사 이후 끊이지 않는 시도와 노력으로 묵묵히 이 평화의 길을 닦아온 국내 여성들의 주체적 역사가 주춧돌이 되어 가능했던 일이다.

 

돌아봄1. 네 번의 만남 속 이야기

여성들의 만남은 1991년에서 1993년까지 진행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세미나에서 시작한다. 여성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트게 된 것은, 오랫동안 기독교 여성운동을 해온 이우정 교수가 1990년 일본 히로시마 평화집회에 참여하여 일본 사회당 참의원 시미즈 스미코 의원을 만나면서이다. 이우정 교수는 분단의 현실과 이산가족들의 상황을 전하며 남북여성의 만남 주선을 요청하였고, 스미코 의원은 역사에 대한 사죄와 청산이 없는 일본에 책임감을 느껴 남북한 화해와 통일을 위해 협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만남이 성사된 데에는 스미코 의원이 회장으로 있던 일본부인회의를 비롯하여, 일본YWCA연합회, 기독교협의회 여성위원회, 기독교 부인교풍회 등 일본 기독여성단체들의 협력이 컸다. 이는 아시아의 냉전지대인 한반도의 분단을 해소하지 않고는 아시아에 평화가 없다는 공통된 인식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남북한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한·북한·일본 여성의 연대가 필요함을 인식하여 처음부터 일본 여성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세미나는 1991년 1월(1차, 동경), 1991년 11월(2차, 서울), 1992년 9월(3차, 평양), 1993년 4월(4차, 동경) 총 4차례가 성사되었다. 1차 세미나에 남·북·일 여성대표 100여 명이 참석하였고, 종군위안부 보상, 한반도 비핵지대화 창설, 조·일 국교정상화를 촉구하는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이 모임에서 남측 이우정 교수가 제2차 서울 세미나 개최를 제안했고, 이를 받아 북측의 려연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제3차 평양 개최를 제안하였다.

 

1991년 11월 25일에서 30일까지 진행된 제2차 서울 세미나는 ‘가부장제 문화와 여성, 통일과 여성, 평화와 여성’을 내용으로 진행되었는데, 예산 없는 대규모 행사의 비용 마련을 위해 교회여성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 7천만 원 예산을 상회하는 총 9천만 원이 모금되었다. 북측은 여운형 선생의 차녀인 려연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김선옥 해외동포영접부 부부장, 정명순 “조평통”참사, 최옥희 평양신학대학 대학원생, 홍선옥 평화군축연구소 연구원 등 15명의 대표단이 판문점을 거쳐 남한에 왔으나, 아쉽게도 북측 참가자 숙소 주변 반공 시위 등으로 인한 신변위협을 이유로 조기 귀환을 발표하고 예정보다 하루 일찍 귀환하였다.

 

제3차 평양 세미나는 1992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 개최되었고, 남·북·일본 여성 대표 총 250명이 참석하였다. 남측은 여성 원로·기자 등 약 30명이 참석하였는데, 당시 조아라 광주YWCA명예회장이 한국YWCA 대표로 참석하였다. 토론 주제는 ‘민족의 대단결과 여성들의 역할’,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전후책임’, ‘평화창조와 여성의 역할’ 등으로, 북한에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가 직접 증언하는 시간이 있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남·북·일 연대를 결의하였다.

 

4차 동경 세미나는 1993년 4월 22일부터 29일 동안 약 1천명이 참여하였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과 전후 보상, 아세아 평화, 한반도 통일의 실현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토론했다. 남측은 종군 위안부의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조사를 우선시하는 반면, 북측은 일본의 사죄와 배상문제를 중요시하는 입장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5차는 일정이 연기되면서 그 후 세미나는 지속되지 못하였다.

 

돌아봄2. ··일 사회에 남긴 것

남북한과 일본의 여성들은 세미나를 통해 각기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한국은 1997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평화통일운동에 나섰고, 북한은 1998년 조선녀성협회를 창립하였으며, 일본은 기존 조성여성과의 연락회를 조선여성과 연대하는 협의회로 개편하였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남북일 여성들이 과거사 청산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공동과제로 결의한 것이다. 4차 토론회는 북한의 NPT 탈퇴로 국제 정세가 좋지 않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한 남북일 여성들의 의지와 협력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또한 1992년 조직되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아시아연대회의는 남·북을 포함,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으로 확장되었으며, 2000년 동경 법정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일본천황을 기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세아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세미나는 2002년 금강산 및 2005년 평양 남북여성통일대회로 연결되어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줬으며, 2015년 국제여성들의 WCD로까지 그 정신을 이어왔다.

 

김일성 주석궁에서 김주석과 기념촬영을 한 남측 대표단.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아라 명예회장. 1992년 제3차 아세아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세미나

 

내다봄. 여성평화 역사를 쓴다는 것

남북여성교류 30주년을 맞이하며 참가자들은 여성들의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음을 자각했다. 남과 북의 여성들이 상호 상반된 역사적 지식과 젠더의식· 사상 속에서 도 합의를 만들고자 애썼던 인내와 지혜, 그리고 남쪽 여성들의 정치적 다양성 속에서도 좌와 우가 조금씩 좁혀진 경험들, 그 자체가 평화·통일의 이야기들이었다.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공적인 공간에서 기억하고 기록함으로써 현재적 의미를 고찰하고 미래의 비전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는 평화를 향한 남북 여성들의 진정성과 주체성이, 국제 여성들의 참여를 통해 한반도 종전 평화 운동에 결합되며 보편성과 확장성을 갖추는 모습을 보고 있다. 평화의 발걸음은 이 땅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이제 새길을 논함에 있어 여성들이 주체되어 원하는 평화 과정에 끝까지 참여함과 동시에 민족과 지역, 젠더와 세대를 뛰어넘는 생명평화 세상의 비전을 통해 평화의 역사를 다시 새롭게 써야할 때이다.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30주년 기념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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