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 대중문화 평론가, 좋은 미디어콘텐츠상 심사위원
언택트 열풍에 힘입어 도약한 K-컬쳐
포스트 코로나 원년은 생각보다 쉽게 오지 않았다. 지난해에 이어 2021년도 여전히 코로나19 범유행의 그늘에 놓인 한해였다. 재난 상황의 장기화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도 불거졌다. 피로와 우울이 가중되는 힘겨운 시대에, 사람들을 위로한 것은 문화의 힘이었다. 올 한해 한국 대중문화는 코로나19 범유행 상황의 언택트 열풍에 힘입어 오히려 한층 높은 도약의 시기를 맞이했다.
결정적 분기점이 된 작품은 글로벌 신드롬의 주역인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다. 2021년 9월,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 시장에 공개된 이 시리즈는 한국 드라마 최초로 미국 이용자들 사이에서 시청 순위 1위를 차지해 화제를 낳았다. 하지만 이조차 시작에 불과했다. 곧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모든 지역에서 시청 순위 1위에 오른 <오징어 게임>은, 공개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넷플릭스 역대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한다. 시청 기록보다 놀라운 것은 화제성이다. <오징어 게임>의 화제성은 드라마로 국한되지 않고, SNS를 중심으로 극 중 음식, 소품, 의상, 음악 등 거의 모든 요소가 패러디 열풍의 대상이 되는 엄청난 파급력으로 이어졌다.
이전까지 한류의 흐름은 1990년대 아시아 지역 중심의 한국 드라마 열풍으로 시작해, 21세기 들어 방탄소년단으로 대표되는 K팝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위시한 한국 영화 등 K-콘텐츠를 향한 관심으로 점차 확대되는 추세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글로벌 OTT 넷플릭스를 매개로, <오징어 게임>이라는 거대 흥행작이 탄생하면서 이제는 K-컬쳐 전반에 대한 국제적 주목도가 높아진 것이다. <오징어 게임> 이후 <마이 네임>, <연모>, <지옥> 등 넷플릭스를 통해 선보인 K-드라마들이 잇달아 글로벌 흥행대열에 합류하고, 드라마를 시작으로 K-컬쳐를 분석하는 외신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익숙한 장르물에 참신한 설정을 녹여낸 K-드라마
K-컬쳐 유행을 주도하는 K-드라마의 힘은 무엇일까. 외신을 포함, 여러 평가를 분석해보면 몇 개의 요인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익숙한 장르물에 참신한 설정을 녹여냈다는 점이다. 원래 초기의 한류를 견인했던 드라마들은 대부분 멜로 장르였다. 욘사마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겨울연가>를 비롯한 사계절 로맨스 시리즈, 김은숙 작가의 ‘연인’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새롭게 주목받는 K-드라마는 좀 더 폭넓은 장르에 포진되어 있다. 가령 넷플릭스 최초의 오리지널 한국드라마 <킹덤>은 좀비 아포칼립스, 최대 흥행작인 <오징어 게임>은 생존 게임 장르, 최근 공개된 <지옥>은 초현실적 재난을 다룬 코스믹 호러물이다.
이들은 모두 기존의 장르물 공식에 한국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녹여내, 장르에 익숙한 서구의 시청자에게는 신선함을, 장르물이 낯선 국내 시청자에게는 친숙함을 선사했다. 예컨대 <킹덤>은 이야기의 배경을 조선시대로 옮겨 양반과 좀비의 충돌이라는 색다른 풍경을 펼쳐 보임으로써, 연상호 감독의 영화 <부산행>과 더불어 K-좀비물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오징어 게임>은 폐쇄 공간에서 최후의 우승자를 뽑는 생존 게임의 틀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설탕 뽑기 등 우리나라 골목 놀이를 중심 소재로 사용해 참신한 이야기를 전개했다.

타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만연한 현실 사회를 반영하는가 하면 인류에 대한 희망도 그려낸 K-드라마
사회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결합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 요인이다. 최근 호평받은 K-드라마들의 공통점은 장르적 흥미로움에 그치지 않고 여기에 사회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결합했다는 데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전지구적 과제로 떠오른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돋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양극화 심화 현상이다. 팬데믹의 장기화는 경제·고용 충격이 저소득층 등의 취약계층에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뜻하는 ‘코로나 디바이드’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심각한 양극화 문제를 대두시켰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에는 바로 이 같은 현실에 대한 예리한 인식이 자리한다. 주인공 성기훈(이정재)을 비롯해 드라마의 생존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빚 독촉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현실을 살아가던 이들이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기훈이 퇴직금으로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뒤 회생하지 못한 채 밑바닥 삶을 전전하는 모습은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 기택(송강호)이 몰락한 과정과 일치하기도 한다. <기생충>이 양극화의 현실을 수직적 계급 질서를 상징하는 주택 구조로 보여줬다면, <오징어 게임>은 관전자인 VIP 계급과 약자가 제일 먼저 탈락하는 생존 게임 구도로 표현한 것이다.
<킹덤>의 주제도 마찬가지다. <킹덤>의 조선시대는 이색적인 좀비물을 보여주기 위한 배경을 넘어, 피지배계급의 고통을 묘사하기 위한 설정이다. 좀비 재난의 근본적 배경에는 지배계급에 의해 착취당한 민초의 현실이 있고, 굶주린 좀비들의 얼굴 위로는 아사당한 백성들의 고통이 새겨져 있다. 올해 공개된 외전 <킹덤: 아신전>에는 이 같은 설정이 더 도드라진다. 주인공 아신(전지현)과 그의 부족은 같은 종족인 여진족에게도, 그들이 세금을 바치는 조선에게도 핍박받는 집단이다. 가장 낮은 피지배계층이 주인공으로 나서면서 기존 <킹덤> 시리즈의 계급 비판은 한층 더 뚜렷해지고, 자연스럽게 이 시대의 양극화 심화 현실을 은유하게 된다.
혐오와 폭력의 현실사회, 인류에 대한 희망도 그려
최근의 K-드라마에는 코로나19로 인한 또 하나의 지구적 문제, 즉 타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만연해진 현실도 반영되어 있다. <지옥>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인간에게 천사라 불리는 초현실적 존재가 나타나 지옥행을 통보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타인을 함부로 낙인찍는 사회의 공포를 이야기한다. 인간들이 지옥행을 선고받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러나 통보를 받은 즉시 그는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그 가족까지 멸시의 대상이 된다. 확진자들 뿐 아니라 특정 지역과 인종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확산시키고 테러까지 불러온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의 어둠이 겹쳐지는 부분이다.
<킹덤: 아신전>에서도 같은 모티브가 발견된다. 천민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아신의 부족이 당하는 고통은 다른 민족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서 기인한다. <킹덤: 아신전>은 이들이 최초의 좀비였다는 설정을 통해, 오리지널 시즌의 좀비에 투영했던 피지배계급의 경제적 재난 위에 인종차별적 재난까지 더한다. <오징어 게임>의 또 다른 주요 인물 새벽(정호연)과 알리(아누팜)에게서도 같은 비극을 목격할 수 있다. 북한이탈주민인 새벽과 이주노동자인 알리의 고난에는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이들 계층의 현실이 정확하게 재현되어 있다. 새벽은 탈북민들을 겨냥한 브로커 사기극에 걸려들어 고통받고, 알리는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는 공장주에게 노동을 착취당한다.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앞선 K-드라마들은 그럼에도 하나같이 인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오징어 게임> 최후의 생존자 기훈은 게임의 상금이 죽은 자들의 목숨값이라는 걸 인식하고 애도를 표하며, <킹덤> 시리즈는 재난 상황에서도 연대하는 자들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지옥> 역시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도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에게서 구원의 빛을 찾았다. 이는 문화가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기능이다. 어두운 현실을 정확하게 비춰야 거기서부터 회복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올해 우리 대중문화가 보여준 절망이자, 새롭게 찾은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