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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슬픔(Eco Grief)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이윤숙(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 부소장)

 

 

우리 모두의 집이 불타고 있다

 

청소년 기후행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우리 모두의 집이 불타고 있다”고 절박하게 외친 그대로 지금 이 지구의 곳곳이 불타고 있다.

 

북아메리카는 물론이고 터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같은 유럽 국가들이 마치 지구의 종말을 보는 것 같은 엄청난 규모의 산불로 타오른다. 그리고 그 기후위기가 몰고온 재앙의 불은 ‘동토의 땅’이라는 자동 수식어가 붙은 시베리아마저 다 태울 듯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지난 7월 한 달 이 끔찍한 화재들로 인해 지구상에서 배출된 탄소량이 3억 4천3백만 톤이나 된다고 한다. 물론 어마어마하다 해도 그 규모를 측량할 수가 없다. 아무튼 관측 이래 산불로 인한 최고의 배출량이다. 그뿐 아니라 탄소보다도 86배나 많은 온실효과를 가져오며 기후변화의 뇌관이라 부르는 ‘메탄가스’ 가 그린란드와 시베리아 등 영구동토층에서 발생하는 산불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배출되고 있다.

 

지구 곳곳이 불타는 반면, 또 지구 여러 곳에서는 전례없는 규모의 태풍과 홍수가 밀어닥쳐 평범한 이의 일상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다. 재난에 대처할 능력이 있다고 하는 독일이나 일본도 그 엄청난 재앙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산불로 숲들이, 마을이, 자신의 집이 타들어 가는 것을 보고 절규하는 그리스의 노인을 보라. 폭풍과 해일, 해수면 상승으로 오랫동안 살던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정처없는 피난길을 떠나는 방글라데시의 여인들을 보라. 홍수에 떠내려 가며 살려달라 절규하는 수많은 중국의 민중들을 보라.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 끔찍한 재앙이 우리를 비켜 간 것에 우리는 얼마나 안도할 수 있나? 그래도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자위할 수 있을까?

 

생태 슬픔과 기후 우울

 

지구라는 우리 모두의 집이 불타고 있는데도 정부와 기업들은 여전히 성장과 이윤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사람들은 이 압도적인 위기상황에 대해 심각한 무력감만 느끼고 있다.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시민들은 기후위기와 코로나가 몰고 온 심각한 위협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마스크 줄을 가위로 자른다.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기 위해 열심히 텀블러와 장바구니를 이용하지만,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더디다. 얼마 전 기후위기의 ‘최후 방어선’이라 했던 지구 온도 1.5도 상승 시기가 10년 남짓 앞당겨질지 모른다는 더욱 암담한 보고서가 발표됐다. 지난 7월 말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발표한 ‘제6차 평가보고서’는, 1.5℃ 지구온난화 도달 시점이 2018년에 발표된 ‘제5차 특별보고서’가 제시한 2030~2052년보다 훨씬 더 앞당겨진 것이다.

 

기후위기가 불러온 코로나 상황도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위기의 양상은 도처에서 재앙급으로 전개되는 것을 마주하며 사람들은 깊은 우울과 절망을 느낀다. 청년들은 지독한 경쟁에 내몰려 취업을 위해 분투한다 해도 자신들에게 내일이 있을까 회의하며 자신들이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세대들일지도 모른다고 비탄한다. 얼어붙은 땅이 녹아버리는 바람에 사냥으로 생계를 잇던 전통적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 하는 이누이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존재를 뿌리 뽑힌 채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여기저기 떠돌며 살아가야 한다. 땅과 동물과 짐승들을 산불로 몽땅 잃은 터키의 농부들도 기후난민이 되어 살 곳을 찾아 전전해야 한 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생물들의 죽음과 함께 조상 대대로 삶을 영위해온 터전을 잃은 사람들, 어렵게 일구어 삶을 송두리째 박탈당한 사람들, 그들의 깊은 슬픔을 우리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이 어마어마한 기후재앙과 생태파괴를 목도하는 이들에게도 이 슬픔은 언젠가 자신에게도 닥칠 예감과 함께 고스란히 전해진다.

 

산불로 비통해하는 그리스 여성, <가디언>지, 2020.8.10

산불로 비통해하는 그리스 여성, <가디언>지, 2020.8.10

심리학자들은 기후재앙 시대의 수많은 죽음과 파괴를 겪고 그 현장을 목도하는 사람들이 겪는 슬픔과 상실감, 분노, 만성적 두려움 등의 감정들을 ‘생태 슬픔(Ecological Grief)’, 혹은 ‘기후 슬픔(Climate Grief)’, ‘기후 우울(Climate Depression)’이라고 명명한다. 그 슬픔의 현장은 단지 막대한 재앙의 피해를 입은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탄저병으로 짓물러진 고추를 눈물로 수확하는 농부들에게도, 죄책감을 느끼 면서 에어컨 전원버튼을 누르는 시민들에게도, 기약없는 코로나 사태로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 도시 자영업자들도 모두 ‘생태 슬픔’을 가슴에 안고 일상을 살아간다.

 

생태 슬픔을 넘어 새로운 전환의 길로

 

하지만 이런 생태 슬픔은 재앙을 목도할 때보다도 오히려 그 재앙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거나 그저 남의 일로만 여기는 무관심 속에서 더욱 증폭된다. 위기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경제성장’의 판타지를 확산하는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기후위기를 새로운 경제성장의 기회로만 바라보는 재난자본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선동질에 편승하여 당장의 편리함만을 좇는 사람들.

 

생태 슬픔은 우리들에게 무얼 말하고 있나.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절망과 무력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생태 슬픔이라는 인류의 집단적 심리는 당장 시급히 실낱과도 같은 희망을 찾아 함께 길을 나서라는 의미일 것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1993년에 만들어진 재난 영화 <얼라이브>에서 안데스 산맥의 눈덮인 산에 추락한 럭비팀 대원들은 70여 일이나 지난 후 기적적으로 구출된다. 이런 믿을 수 없는 기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희망’을 찾아내려고 하는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막막한 눈 덮인 안데스 산맥 어딘가에는 반드시 시냇물이 흐르고 푸른 숲이 펼쳐지는 그런 길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끈질기게 찾아나선 한 사람 때문이었다. 슬픔과 절망에 압도당하여 길 찾는 그를 몇몇 동료들이 어리석다고 비난할 때도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사력을 다해 길을 찾아 나선 그가 마침내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생태적 슬픔은 우리를 압도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를 새로운 전환의 길로도 이끌 수 있다. 우리가 멈추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믿으며 행동에 나설 때 말이다. 레베카 솔닛은 그의 책 <어둠 속의 희망>에서 이렇게 썼다. “희망하는 것은 도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미래에, 당신의 욕망에, 열린 가슴과 불확실성이 암울함과 안정보다 나을 가능성에 거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산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기에, 희망하는 것은 두려움의 반대다.” 그렇다. 생태 슬픔은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위험에 나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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