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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김필례, 유각경 선생에 의해 창립된 한국YWCA 초기의 활동들은 주로 계몽, 교육, 생활개선 여권신장, 민족운동 등에 집중되었다. 당시 여성 들을 괴롭히던 조혼, 공창제도 폐지와 축첩제의 반대 등을 통하여 여성들의 권익보호는 물론 애국정신을 기반으로 물산장려운동에도 앞장섰다.
1950, 60년대 YWCA는 박에스터 선생의 영향으로 지도력 훈련을 강화하면서 민주적이며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여성지도력을 배출해 내는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소외지역을 위한 활동을 개발하여 봉사활동을 하는가 하면 청계천 노동자들을 위한 평화교실을 개설하였고 노동자 문제에도 개입하여 노동자들의 권익보호와 생활 조건 향상, 더 나아가 근로여성들의 직업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에 주력하였다. 또한 여행원 결혼 각서 폐지운동, 여성조기 정년제 폐지운동, 가족 개정법 운동에 앞장서면서 여성의 인권신장에 앞장섰다. 1980년대 후반부터 외채를 줄이고 소비를 절약하는 경제자립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했다. 또한 생활 속에서 실천 가능한 환경운동을 벌였으며 냉전의 종식과 새로이 개편되는 세계화의 질서 속에서 통일 문제를 중심으로 한 평화프로그램을 전개하였다. 365일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운동, 연변 한민족여성대회를 열어 민족통일을 전망하면서 흩어진 여성동포가 함께 할 수 있는 역할을 모색했다. 1995년 세계YWCA 100주년 대회를 한국 서울에서 갖게 되어 성공적으로! 대회를 치름으로써 다시 한번 한국YWCA의 저력을 드러내었다. 특히 1998년 IMF 파동으로 외환위기 사태가 빚어지자 외화 모으기 캠페인, 사랑의 먹거리 나누기 운동, 실업충격완화 및 창업준비 프로그램, 여성실업자를 위한 재활용 공공근로사업 등을 전개하면서 우리 경제 살리기 시민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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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례, 김활란, 유각경에 의하여 한국YWCA강 창립되었다. 동경 유학 중 세계 여성단체인 YWCA를 접한 김필례 선생과 이화학당의 김활란 선생, 그리고 중국 유학 중 YWCA 활동 을 하고 있던 유각경 선생이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 여성들을 모아 한국YWCA를 탄생시켰다. 당시 조선여성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 아래 봉건사회 관습이라는 이중 억압을 받고 있었다. 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기독여성단체의 조직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뜻을 모았다. 창립과 동시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한국YWCA는 계몽, 교육, 생 활개선, 여권신장, 민족운동 등에 힘을 쏟았는데 초기에는 계몽사업과 생활개선운동에 주력했다. 공민학교를 운영하며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했으며 요리강습, 흰옷 염색하기, 부엌 및 화장실 개조 등 생활개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YWCA는 여성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당시 여성들을 괴롭히던 조혼/공창제도 폐지운동과 축첩제도 반대운동을 펼쳤으며 민족의 경제를 위협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애국운동 차원에서 물산장려운동에도 앞장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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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WCA가 펼친 이 같은 계몽, 교육운동은 농촌운동에서 심화되었다. 민족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농촌이 튼튼해져야 한다는 일념아래 농촌을 위한 각종활동을 전개하였다. 수원 샘골에 최용신 여사를 파견하여 전개한 농촌운동은 그 시대 가장 대표적인 농촌운동이 되었다. 이렇듯 활발하게 전개되던 YWCA활동은 일제 말기에 이르러 탄압이 극심해져서 더 이상 활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천황신민화정책을 내세우며 특히 기독교를 탄압 하였는데 결국 조선YWCA도 1938년 일본YWCA에 소속되었다가 1942 년 끝내 문을 닫았던 수난의 역사를 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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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함께 안으로는 연합회 조직을 다지고, 밖으로는 세계YWCA 정회원으로 승인을 받는 등 굳건한 조직과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런 와중에 1947년 박에스더 선생이 한국YWCA에 파견됨으로써 더 큰 발전이 가능했다. 그러나 6.25전쟁은 다시 혼란을 가져왔다. 피난지인 부산에서 YWCA는 밀려드는 피난민들을 위한 구호활동에 주력하기로 하고 우유죽을 끓여 배급하고, 무의탁 소녀들 에게 농업, 원예, 축산, 가내수공업 기술을, 전쟁미망인들에게 양재, 편물 기술을 전수하여 생존능력을 가지도록 도왔다.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YWCA활동도 날로 발전해 나갔다. 각 지역에서 회원YWCA가 설립, 확장되었고 회관도 마련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박에스더 선생의 영향으로 지도력이 계속 훈련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지도력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김현자, 김봉화 두 분을 미국에 파견하여 훈련시켰다. 대학생과 YWCA-Teen을 분리시켜 학생운동을 활성화시켰고 새로운 프로그램들의 개발로 학생활동을 더욱 다양하고 활발하게 발전시켰다. 당시 지도력이 크게 요청되던 사회에서 YWCA는 여성지도력을 배출해 내는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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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성으로 하여금 시민의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도록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한국여성의 사회참여를 불러일으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중에서도 특기할만한 것은 민법상에 있어서 여권향상을 위한 노력이었다. 1957년 <여성과 친족상속법>이라는 소책자를 발행해 널리 배부하였으며 혼인신고 강조운동을 펼쳤으며 1962년 친족상속법 개정과 가사재판소 설치 주장 건의문을 제출하면서 여성의 지위와 권리 향상을 위한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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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와 5.16 등으로 이어진 정치혼란 속에서 사회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축첩자에게 투표하지 말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와 강연을 벌이고 부정 축재자 및 축첩자 축출운동 을 전개했다. 그 열기는 국산품애용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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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사회의 급속한 산업화는 급속한 이농현상, 도시 빈곤층 형성 등 한국사회의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여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Y는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주목하고 이들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쳤다. Y는 저임금, 피폐한 직업환경, 부당한 대우에 지친 여성근로자를 위한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 개발, 개인상담을 통해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한 사람의 여성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음을 일깨웠다. 또한 근로여성 좌담회에서 기업주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착취 현상에 대해 주목하고, 근로여성의 복지향상과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근로여성의 실태를 세밀히 조사하고, 이러한 문제를 기업주와 공유하며, 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특히 마산지역에 근로여성을 대상으로 건강관리, 상담실 운영 등 여성노동자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업을 시행하였는데, 근로자 200인 이상 업체에 상담원을 두도록 하여 근로기준법, 여성건강, 심리안정 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며 소외된 여성근로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사회 및 여성근로자들의 적극적 참여를 끌어낸 좋은 사례로 기록되었다. 산업화의 영향은 농촌지역사회에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농촌지역 사업 또한 기존 내용의 변화를 요구했다. 도시-농촌간 빈부격차의 심화로 농촌근대화라는 새로운 흐름 아래 Y는 농촌지역의 발전이 산업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비인간적, 경제성장 중심이여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농촌개발사업을 시행하였다. 기존의 형식적이고 단기적이었던 도시-농촌간 자매결연 및 Y 회원들의 봉사활동, 모금활동에서 나아가, 농촌환경개선, 소득증대, 농촌지역 자치조직활동 촉진 등 농촌지역을 교육, 문화면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돕고, 이를 위해 농촌지역주민의 의식계발을 증진시키는 측면에도 힘썼다. 1970년 사회정의실현을 선포한 Y는 적극적으로 소외계층과 함께 호흡하고 그들의 현실을 체득하며, 지역사회에 대한 바른 인식과 주민의 자조적 역할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실행에 옮겼다. 대학생 회원조직은 도시빈민층 및 농촌지역의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실질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및 주민자치활동을 실시하였다. 또한 도시지역 저소득 계층 및 농촌지역을 위한 유치원 및 탁아소 운영 등 보육서비스 제공, 여성의 의식과 역할을 바꾸는 교육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여성들이 마음놓고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지역간 격차, 도시와 농촌간 격차를 줄이는데 기여하였다. 도시 및 농촌지역의 근로여성을 대상으로 야간학교를 개설하여 정규과정에 진학하지 못한 여성에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산업화에 의해 소득수준이 높아진 중산층의 형성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건설적인 여가활동문화가 없는 상태에서 도박, 사치, 무분별한 소비의 풍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문제에 주목한 Y는 중산층 여성들의 취미와 자질을 살려 가정, 지역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조직적인 클럽활동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가정 및 지역사회 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서의 자각을 일깨우는 교육으로부터, 요리/꽃꽃이/합창단 등 취미활동, 가족계획/식생활개선/아동교육/위생/건강관련 등의 강좌 등 서울 Y를 중심으로 하여 주부들의 클럽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정치, 경제 및 각종 사회문제 등 여성의 일상생활을 정치경제와 관련시킨 강의를 통하여 여성의 의식변화와 시대상황의 이해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클럽의 자치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이러한 클럽운동은 향후 여성/소비자/환경/통일 운동 등 건강한 한국사회를 만들어 가기위한 근간에 여성의 힘을 발휘하는데 큰 토양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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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보호운동은 Y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또 하나의 실천이었다. Y의 소비자 운동은 소비의 주체는 여성이며 소비자가 주인이라는 의식을 일깨워주고,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생산보다 소비자인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소비자운동의 효시였다. 경제발전이 제일의 과제로 대두되면서 '생산자의 이익에 희생될 밖에 없는 소비자' 가 당연시 되는 사회를 경계하며, 소비자의 정의, 권리 등을 주창하고 실제 구매활동에서 벌어진 피해사례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소비자 계몽활동 및 제품 생산/유통/제품 분석 등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소비자 권익보호 운동을 시행하였으며, 각 여성단체 대표들을 초청하여 소비자보호위원회를 발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독립된 소비자보호위원회를 조직한 Y는 소비자의 주체적인 법적 권리를 확보하면서, 계몽과 교육을 병행하고, 소비자 피해 및 제품 테스트 사례를 과학적 근거로서 뒷받침 하는데 노력하며, 이러한 사례를 전 사회적인 문제로 이슈화 하고, 정부의 정책차원에서 소비자인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등 소비자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공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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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50년을 넘어선 한국YWCA는 반백년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보다 발전적으로 운동을 모색하고자 노력하였다. 범여성단체운동 차원에서 가족법 개정운동을 전개하고 소비자운동을 주도적으로 움직여갔으며 세계YWCA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환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또한 여성노동자의 근로조건 개선 및 의식향상과 여성들의 직업개발에 힘을 쏟아 냈다. 1950년대부터 전개해온 가족법 개정운동을 보다 심화시켜 범여성단체 운동으로 확장하면서 지속적인 강연회를 통해 의식 확산을 시켰으며 수 차례의 건의문을 제출했다. 소비자운동 또한 활기를 띠고 전개되었는데 서울의 경우 상설소비자고발센터를 운영하면서 시민들의 발이 되고자 노력했다.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이 인권운동이라는 신념으로 소비자 전국대회를 가졌으며 강력한 압력단체로서의 기능을 다했다. 특히 1974년 인천 공해 유발 공장 설립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설립을 취소시 키는 성과를 거둠으로 환경운동의 삭을 틔우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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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성노동자들의 차후개선을 위해 노력하면서 그들을 위해 상담활동과 직업훈련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중등교육과 정을 설치하였다. 대학YWCA를 중심으로 노동교실과 빈민지역 여성교실 등을 통해 사회봉사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버스안내원의 인권옹호를 도모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 하였고 1977년에는 남영나이론 사장 면담 통해 노사협상을 중재했으며 1978년에는 동일방직 노사협상과정에 동참, 해고노동자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저소득층 여성들을 위한 타일, 도배, 페인트 등 새로운 직업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직종과 직업에 대한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변화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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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과 한국 사회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한국YWCA는 오랜전통을 바탕으로 소외된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위한 제도개선 직종 개발과 직업무료상담활동, 장애인을 위한 복지운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외부적으로는 한국 여성운동의 세계적 수준으로의 도약을 위한 발판을 구축했다는 점, 새롭게 등장한 진보적인 여성단체들 속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 YWCA가 도전을 받으면서 새롭게 연대의 틀을 형성해 나아갔다. 특히 농촌여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생활이 보다 윤택해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지역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시설에 주목하여 방앗간, 목욕탕, 구판장 등을 만드는 일을 통해 여성의 직업 타일, 도배, 페인트, 감귤전정(제주)까지 창출하면서 지역 사업으로 공동협력의 길을 모색했다. 또한 농촌여성과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해 영양특별사업을 전개하며 식생활운동과 생활개선운동을 펼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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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다양한 직업개발 및 훈련과 무료직업상담실운영은 저소득층 여성들의 경제자립을 도모하고, 직업분야에서 남녀평등의식과 성별의 벽을 허무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기회의 평등, 고용의 평등을 위하여 여성의 능력을 개발하고, 제도개선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는데 25세 조기정년제 폐지운동을 꼽을 수 있다. 또 한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여성운동에 있어서 자원봉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장애우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자원봉사활동을 확대시켜 가고 장애우를 위한 편의시설 확충에 힘을 쏟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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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시설에 장애자를 위한 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는 규정을 제도화할 것을 건의하고 김포국제공항을 비롯한 몇몇 공공시설에 장애자를 위한 엘리베이터 설치 등을 성사시켰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들과 함께 캠프를 하고 더불어 사는 훈련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일일 찻집 등을 열어 이들을 위한 기금 마련 프로그램들도 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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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히 성장한 사회운동과 여성운동의 격동기 속에서 기독청년여성회원 운동체로서 중도 화해자 역할을 수행하는 봉사 조직으로 내부 정체성을 정리한 한국YWCA는 활발한 연대운동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고유한 운동들을 전개해 갔다. 민주화 열기로 뜨거웠던 이때 YWCA 역시 고문근절 등을 촉구하고, 365일 철야기도운동을 펼치며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이 평화운동은 전쟁장난감 제작중지 요구, 북한여성과의 만남 추진 등 통일운동으로 이어져 두 차례(연변, 뉴욕)의 한민족여성대회를 성사시키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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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고용평등법 통과 이후 시행된 시범직장탁아소 10개 중 6개를 YWCA가 설립하여 직장탁아의 모델을 창출하고, 지역탁아모를 훈련하여 탁아운동에 기여했다. 또 여성의 직업능력개발과 취업확대를 위해 일하는여성의집(현 여성인력개발센터) 사업을 개발하고 예산을 확보하여 노동부 지원사업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 동안 YWCA가 펼쳐왔던 여성직업 개발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입시위주의 학교교육현실 개혁을 주장하며 어린이 철학교육 등 인간 중심의 창조성 개발에 역점을 두는 대안교육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전인교육 차원에서 어린이 철학교육, 어린이 만화 모니터링 등을 실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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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합성세제 정량 쓰기, 수은전지 수거운동, 쓰레기 재활용방안 및 분리수거운동 등 환경운동을 벌였는데 YWCA가 독자 개발한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받아쓰고, 다시쓰기)사업은 대표적인 전국민의 생활실천운동이라 할 수 있다. 생명운동차원으로 확대된 소비자운동은 양담배불매운동, 바른삶실천운동으로 이어졌다. 전국 회원 모두가 참여한 바른삶 실천운동은 절제와 분수에 맞는 생활을 강조하며 혼수 줄이기, 돈봉투 근절운동, 퇴폐향락 문화추방운동, 인신매매 추방운동으로 펼쳐졌다. 이것은 우리농산물먹기운동과 우루과이라운드 반대운동까지 이어져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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